양양 오산리 선사유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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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 오산리 유적
양양 오산리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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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강원특별자치도 양양군 손양면에 있는 석기시대 신석기의 석기와 토기조각이 출토된 집터. 시도기념물.
정의
강원특별자치도 양양군 손양면에 있는 석기시대 신석기의 석기와 토기조각이 출토된 집터. 시도기념물.
개설

1977년 봄에 이 곳의 흙을 파다가 호수를 매몰, 농지로 전용하기 위한 작업 중 다량의 석기 · 토기편이 출토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 뒤 1980년까지 서울대학교 고고인류학과 조사팀이 모두 6차에 걸친 지표 조사를 실시했고, 1981년부터 1985년까지 서울대학교 고고인류학과에서 본격적인 발굴 조사를 실시하여 모두 3권의 발굴보고서가 출판되었다.

내용

유적지는 동해안에서 내륙 쪽으로 200m 정도 떨어진 쌍호라고 불리는 자연 호숫가의 사구(砂丘) 위에 형성되어 있다. 이 사구는 쌍호의 북동 모서리 부분의 제방이기도 하다. 유적의 범위는 약 6,000㎡로 추정되는데, 이제까지 600㎡를 발굴하였다.

현재의 지표면으로부터 생토면까지의 깊이는 약 4.5m로, 모두 6개의 자연 층위가 나타났다. Ⅰ층은 청동기시대의 적갈색 무문토기 · 점토대토기 · 우각형손잡이, Ⅱ층은 첨저형 빗살무늬토기, Ⅲ층은 평저형 유문 · 무문양토기, Ⅳ층은 유물무포함층, Ⅴ층은 평저형 토기 · 융기선문토기, Ⅵ층은 유물무포함층이었다. 그런데 유적의 극히 일부에만 있는 Ⅰ층의 청동기시대층을 제외한 나머지는(Ⅳ층과 Ⅵ층은 유물무포함층) 신석기시대에 해당한다.

청동기시대인 Ⅰ층은 암황갈색 점토층으로 두께는 약 40㎝이다. 이 층은 전체 유적 중 극히 일부 지역에만 국한되어 있는데, 유기물이 많이 섞여 있다. 적갈색 무문토기, 점토대토기 및 우각형손잡이가 출토되었다. 이들과 함께 채집된 목탄시료를 방사성탄소 연대측정법으로 측정한 결과 서기전 2070∼1510년(수륜보정)의 연대가 나왔다.

신석기시대 상층인 Ⅱ층은 암갈색 사질층으로 두께는 20∼65㎝이다. Ⅰ층이 남아 있지 않은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Ⅱ층이 표토로 노출되어 있다. 이런 관계로 후세에 교란된 곳이 많다. 여기서는 서해안 지역 신석기시대의 특징적인 토기 형태인 첨저형(尖底形)이 출토된다. 토기 표면에는 구연부 및 기복부에 시문한 것이 많은데, 양 부위에 서로 다른 문양요소로 시문한 것과 같은 문양으로 시문한 것이 있다.

전자의 구연부에는 평행밀집사단선문 · 사격자문 · 조대문(組帶文) 등으로 시문하고 그 밑의 기복부에는 어골문으로 시문한 것이 많다. 후자는 구연부에서 기복부까지 어골문으로 시문한 것이 주체를 이룬다. 태토(胎土)에는 수적으로는 적으나, 석면(石綿)을 혼입한 것도 있다. 반출 석기 중에는 납작한 강자갈의 양단을 쪼아내어 만든 어망추가 있다. 이렇듯 토기 · 석기의 여러 특징에는 서해안과 공통점이 있다.

신석기시대 중층인 Ⅲ층은 암갈색 사질층으로 두께는 약 30㎝이다. Ⅱ층과는 두께 약 5㎝의 흑색 사질의 간층(間層)을 사이에 두고 그 아래에 있다. 토기의 기형은 예외 없이 평저형인데, 저부에는 나뭇잎 모양이 찍혀 있는 것이 많다. 이들 토기에는 유문양토기와 전혀 문양이 새겨져 있지 않은 무문양토기의 두 종류가 있으나 후자가 수적으로 많다. 유문양토기편 중에는 동부지역 토기류와 유사한 것이 있으며, 이러한 유문양토기와 함께 점토제 안면상(顔面像) 한 개가 채집되었다.

신석기시대 하층인 Ⅴ층은 다시 7개의 소층(小層)으로 세분된다. 여기서는 6기의 주거지가 확인되었다. 지름 6m 정도의 원형 주거지 안에는 70×70㎝ 크기의 사각형 노지(爐址)가 한두 개씩 있고, 다수의 평저형토기 및 소량의 융기선문토기, 그리고 돌로 만든 생활 도구류가 출토되었다.

토기의 기형은 모두 평형을 기본으로 한다. 좁은 저부에 비해 몸체 부분이 넓은 발형토기(鉢形土器)가 대부분이며, 옹형(甕形) 또는 호형(壺形)의 토기도 있다. 시문은 구연부위에 국한하였다. 문양의 시문수법은 세 가지로 구분된다. 압날문(押捺文)의 경우 점문(點文)이, 음각문(陰刻文)의 경우 종위평행단선문(縱位平行短線文)이, 압날문과 음각문이 혼합된 경우 이들 두 문양 요소의 결합 형태가 각각 주체를 이룬다. 토기의 표면은 마연에 의한 조정으로 광택이 난다. 석기로는 결합식조침(結合式釣針) · 톱 · 사각형석도 · 흑요석인기(刃器)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어업 관련 도구들이 다수 출토된 점으로 보아 어업에 커다란 비중을 둔 생활을 영위했음을 알 수 있다.

Ⅴ층의 각 소층에서 채집한 목탄시료 7개를 방사성탄소 연대측정법으로 측정한 결과 서기전 6000∼5000년 사이로 나와 이제껏 알려진 신석기시대 유적 중 가장 오랜 연대를 보인다. 한편, 이 곳에서 출토된 흑요석기를 형광 Ⅹ선 분석 결과 그 원석(原石)의 산지가 백두산으로 밝혀져 그 곳과의 문화적 관련성을 시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이와 같은 층서관계 · 출토유물 · 방사성연대 측정결과 등을 통해 오산리 신석기하층(Ⅴ층)은 한국에서 비교적 이른 시기에 속하는 신석기 문화 단계임이 밝혀졌으며, 동한 평저형 토기문화가 서한 첨저형 토기문화에 선행했음이 확인되었다. 또한 지리적으로 서포항유적과 남해안의 신석기시대 문화를 잇는 중간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 신석기문화의 기원 해명 및 주변지역과의 문화적 상관관계를 파악하는 데에도 유력한 단서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한국의 신석기시대 집자리』(구자진∙배성혁, 2009)
『한국 신석기문화의 원류와 전개』(이동주, 2007)
『한반도 신석기문화의 신동향』(이상균, 2005)
『한국의 신석기문화』(임효재, 2000)
「강원도오산리유적 발굴진전보고」(임효재, 『한국고고학연보』9, 1982)
「오산리유적 발굴조사개보」(임효재, 『월간문화재』7, 1982)
「강원도동해안의 즐문토기문화」(백홍기, 『역사학보』87, 1980)
「양양군오산리 즐문토기유적」(백홍기, 『고고미술』138·139,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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