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원왕은 삼국시대 고구려 제24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545~559년이다. 안원왕의 맏아들로 태자에 책봉되었으나 자기 소생을 왕으로 세우려고 싸우던 두 왕비와 그들을 후원한 귀족세력간의 충돌 속에서 즉위했다. 그 결과 왕의 전제적 권한은 크게 도전받았고 재위 기간 동안 귀족세력간의 분쟁이 계속되었다. 중국의 북제와 외교관계를 유지했으나 돌궐과의 대치로 국력을 소모했고 그 와중에 신라와 백제 연합군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겼다. 대외적 위기상황이 계속되자 귀족들이 분쟁을 중단하고 귀족연립정권을 형성해 국정의 안정을 도모하기도 했다.
양강상호왕(陽崗上好王) 또는 양강왕(陽崗王)이라 했으며 이름은 평성(平成)이다. 안원왕(安原王)의 맏아들로 533년(안원왕 3)에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안원왕이 죽은 뒤에 왕위를 계승하였다. 『양서(梁書)』에는 양원왕의 즉위년이 548년으로 되어 있으나, 일반적으로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대로 545년이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양원왕의 즉위과정은 순탄하지 못하였다. 안원왕이 죽은 뒤 두 왕비가 각각 자기 소생의 왕자를 왕으로 세우려 하여 두 왕자를 지지하는 세력들 사이에 군사적 충돌이 발생하였다. 이 충돌과정에서 양원왕(陽原王)을 밀던 추군(麤群)이 다른 왕자를 지지하던 세군(細群)에게 승리함으로써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왕위에 오른 뒤에도 왕의 전제적 권한이 크게 도전받아 왕권이 점차 약화되어갔다.
『삼국사기』 거칠부(渠柒夫) 열전을 보면 551년(양원왕 7)에 거칠부를 만난 고구려의 고승 혜량(惠亮)이 나라에 정란이 있어 멸망이 멀지 않다는 말을 했다고 되어 있어 지배세력간의 분쟁이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혜량이 거칠부를 만나서 망명의 뜻을 표시하고 몇 년 뒤 거칠부가 이끈 신라군이 한강 유역을 공격해 왔을 때 거칠부를 따라 신라로 이주해 갔다. 혜량의 경우는 양원왕 즉위 이후 여전히 지배귀족들 사이의 분쟁으로 인한 혼란이 지속되고 있었으며, 그러한 혼란이 혜량이 주석하고 있던 지방에까지 확산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557년에 환도성(丸都城)의 간주리(干朱理)가 모반을 꾀했는데 이 역시 고구려 내부의 동요를 보여준다. 간주리로 대표되는 환도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귀족세력과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귀족세력의 대립이 분출된 것이다. 이 또한 양원왕 즉위와 관련된 귀족세력 간의 분쟁의 여파가 지속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왕권의 동요와 더불어 국제관계도 불안한 상황이었다. 북아시아의 신흥 유목 기마민족인 돌궐(突厥)이 551년에 고구려의 신성(新城)과 백암성(白巖城)을 공격하였다. 이에 장군 고흘(高紇)이 군사 1만을 거느리고 나아가 그들을 크게 격파했으나, 돌궐과의 대치로 고구려는 매우 큰 국력소모를 겪었다. 돌궐과의 대치상태 속에서 551년에는 신라와 백제의 연합군에 의해 한강유역을 빼앗겼다. 중국과는 동위(東魏) 및 동위를 계승한 북제(北齊)와 교류를 계속하였다. 550년에는 북제로부터 ‘사지절 시중 표기대장군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使持節侍中驃騎大將軍領護東夷校尉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에 봉해졌다. 그러나 552년 북제의 사신 최유(崔柳)가 무례한 행동을 보이고, 553년에 북제의 문선제(文宣帝)가 고구려의 세력이 미쳤던 거란족(契丹族)에 대해 친정(親征)을 함으로써 양국간의 긴장이 고조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대외적 위기상황 하에서 고구려의 귀족들은 서로 간의 분쟁을 중단하고 귀족연립정권(貴族聯立政權)을 형성했다. 즉, 실권직인 대대로(大對盧)를 유력 귀족들 사이에서 3년마다 선임하고 중임할 수 있는 형태로 개편함으로써 장기간에 걸친 대외적 위기상황에서 귀족 간의 타협과 연립을 통한 정권의 안정적인 지속을 도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