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국악원에서 여성들만이 떨어져 나와 여성국악동호회라는 것을 조직한 것이 여성국극의 뿌리였다. 박녹주(朴綠珠)를 대표로 하여 김소희(金素姬)·박귀희(朴貴姬)·임춘앵(林春鶯)·정유색(鄭柳色)·김경희(金慶姬) 등 30여 명이 조직한 여성국악동호회는 1948년 10월에 <옥중화 獄中花>로 시공관에서 창립공연을 가졌다.
여성들만이 단원이었기 때문에 여성국악인들이 남장(男裝)을 하고 공연한 점에서 일본의 다카라쓰카(寶塚)와 비슷하였다. 다만 우리의 여성국극은 고전적인 표현방식으로서 창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다를 뿐이다.
다음해 <햇님달님> 공연으로 크게 인기를 얻은 여성국악동호회는 그 여세를 몰아 창극계를 압도해갔다. 6·25전쟁 중 피난지에서도 여성국극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이처럼 단 몇 년 안에 대중예술의 총아로 떠오르자 돈이 생겼고 이것은 단원들을 분열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여성국악동호회가 해체되면서 주요 단원들이 햇님국극단을 창립하였고 지방에서는 여성국악동지사(女性國樂同志社, 1952)·여성국극협회(1956)·삼성창극단 등이 설립되었다. 이들의 레퍼터리는 거의 야사(野史)·설화·전설을 사랑과 이별을 중심으로 재구성한 것이 특징이었다.
<공주궁의 비밀>·<낙화유정>·<무영탑>·<목동과 공주>·<선화공주> 등이 모두 그러한 계열의 인기작품들이었다. 이처럼 주제가 사랑과 이별, 은혜와 복수, 권선징악, 인과응보의 멜로드라마였기 때문에 대체로 해피엔딩이었다.
여성국극은 전쟁 직후 더욱 인기를 끌었지만 영화의 발달로 조금씩 그 인기가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여성국극단이 너무 많이 늘어난 데다, 대중의 통속취미에 영합했으며 주제나 표현방식이 너무 고루하고 진부하여 1950년대 말엽부터 급격히 쇠퇴의 조짐을 보였다.
그 뒤 역사의 변화와 시대감각의 변화에 전혀 대응하지 못하고 후진양성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1960년대 초에 급격히 몰락하였다. 더욱이 텔레비전의 등장으로 인해서 여성국극은 대중에게 시대착오적이리만큼 진부하게 비쳐졌다. 1970년대 후반부터 간간이 재기의 몸부림을 한 바 있으나 옛날 관객들의 향수를 달래주는 데 그치고는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