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6월에 북한의 사회과학원 고고학 및 민속학연구소의 유적조사단이 발굴 조사하였다. 유적은 공포리마을 안에 후동마을 북쪽 속칭 ‘샘물치기골짜기’ 안에 너비 40m에서 50m 정도의 좁은 협곡을 건너 서쪽 능선상에 남북으로 질서있게 분포되어 있다.
고분들 중에는 석상분, 북방식 탁상형 고인돌, 연도를 갖춘 고분들이 혼재 분포되어 있다. 이것 중 석상분 제1·3·4·5호, 고인돌 제2호, 연도석실고분(羨道石室古墳) 제7호 등을 발굴하였다.
고인돌 제2호의 구조는 남북 길이 220㎝, 두께 15㎝의 점판암으로 된 석실구조를 갖추고 있다. 석상분 제1호는 고분군의 북동쪽에 위치해 있다. 동서 양 측석의 깊이는 100㎝ 내외이고 길이는 70㎝ 내외의 장방형으로 되어 있다. 석상분 제3호는 제1호분에서 11m 거리에 위치해 있다. 동서 길이 150㎝이다.
석상분 제4호는 제3호분에서 서남쪽 10m 지점에 위치하고 동향이다. 구조 역시 동서 길이 140㎝, 너비 60㎝의 장방형 구조이다. 석상분 제5호는 140㎝ 측석에 길이 85㎝의 얇은 석판으로 된 장방형의 구조이고 북향이다.
석상분 제3호분에서 14m 거리에 있는 고인돌은 특이하게도 석실 주변을 돌로 축석하면서 조성된 고인돌이다. 석상분 제6호는 90㎝의 간벽(間壁)을 둔 쌍곽고분으로 석곽 두께가 70㎝에 달하며, 연도를 갖춘 간단한 고구려의 고분이다.
제7호는 쌍곽고분에서 남쪽 22m 지점에 있다. 고분의 구조는 남쪽으로 18°기울어진 동향으로서 현실의 규모는 길이 200㎝, 너비 100㎝의 장방형이다. 현실 북쪽 벽에 길이 120㎝의 연도가 있다.
특히, 이들 고분 중 석실고분의 방향이 동남향임과 관대를 남벽에다 설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는 연도의 위치와 반대되는 곳에 관대를 시설하려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닌가 한다.
고인돌 제2호에서는 관옥 2개, 길이 4㎝, 지름 1.8㎝의 벽옥제 원통형 옥 1개, 길이 4.2㎝, 지름 1.8㎝의 청색 점판암제 옥 등이 출토되었다.
석상분 제3호에서는 점판암제 석촉 6점, 유병석촉, 첨저형 토기편 등이 출토되었다. 석실고분 제7호에서는 2인분의 사람뼈가 출토되었다.
이 고분군은 청동기시대에서부터 고구려시대에까지 연결되는 고분들이 혼재되어 있는 지역으로서 중요한 유적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