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이정암은 이조참의로 재직하였다.
선조가 파천을 단행하자 뒤늦게 그 사실을 알고 왕을 뒤쫓아 개성에 도착하였다. 그는 이미 해직된 터라 개성유수(開城留守)로 있는 아우 이정형(李廷馨)과 함께 개성을 지키려 하였다. 그러나 임진강의 방어선이 무너져 개성을 지킬 수 없음을 알고 황해도 연안으로 들어갔다.
부사로 있을 때 쌓은 정이 있어 부민(府民)들이 모여들었고, 조종남(趙宗男) 이하 수십 명이 의병을 일으킬 것을 권하였다. 이정암은 권고를 즉각 받아들여 약서책(約誓冊)에 의병자원자의 성명을 적고, 1592년 8월 초순경에는 의병 조직을 끝냈다.
왕세자로부터 초토사로 임명된 이정암은 의병 약속(義兵約束)으로 8개 항을 제시하였다. ① 적진에 임하여 패하여 물러가는 자는 참수한다. ② 민간에게 폐를 끼치는 자는 참수한다. ③ 주장(主將)의 일시의 명령이라도 어기는 자는 참수한다. ④ 군기를 누설한 자는 참수한다. ⑤ 처음에 약속했다가 후에 가서 배반하는 자는 참수한다. ⑥ 논상할 때 적을 사살한 것을 으뜸으로 하고 목을 베는 것을 그 다음으로 한다. ⑦ 적의 재물을 얻은 것은 모두 상금으로 준다. ⑧ 남의 공을 빼앗은 자는 비록 공이 있다 해도 상을 주지 않는다. 이렇게 이정암은 연안성을 사수할 것을 결의하고 500여 명의 의병을 조련(操鍊)시켰다.
8월 22일 입성할 때 성 안의 민가는 모두 비어 있었다. 그러나 성을 지킨다는 소식을 듣고 피란 갔던 사람들이 속속 돌아오고 도망했던 부사도 돌아왔다. 그러나 입성한 지 채 5일이 안 되어 해주에 본거지를 두었던 일본장군 구로다가 5,000∼6,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침입하였다. 8월27일부터 9월2일까지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진 끝에 일본군은 크게 패해 무수한 인명 피해, 병기·군량 등의 손실을 보았다.
초토사 이정암은 전투 경과를 보고하는 대신에, 단지 “모일(某日)에 성을 포위했다가 모일에 풀고 갔다[某日圍城某日解去]”라는 여덟 글자만 행재소에 전하였다. 그러나 사실이 곧 알려져 초토사 이하 유공장병은 상직(賞職)을 받고, 이정암은 본도 순찰사에 임명되었다.
연안대첩으로 연안 이북 연해 10여 읍의 떠돌던 백성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도피한 수령들도 본읍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더욱이 단절되었던 충청도와 전라도의 사람과 물자가 연안성을 통해 행재소와 내왕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