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재를 사용하는 회유(灰釉)와 더불어 고대 동양 유약의 양대 축을 형성한다. 일반적으로 1000℃ 이하, 대개 700℃에서 800℃ 부근에서 녹는 저화도(低火度) 유약으로, 산화납(PbO)을 주성분으로 하여 카올린(Kaolin : 고령토)·규석(硅石)·장석(長石) 등을 보조제로 사용하고 있다.
유약이 녹는 온도는 보조제의 성분 비율에 따라 달라지는데, 규석이나 장석의 상대비율을 높이면 용융(熔融 : 녹아 섞임) 온도가 올라간다. 또한 연유는 기본 투명유에 금속산화물을 첨가하면 각종 색유(色釉)의 제작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동(銅)을 첨가하면 녹유(綠釉), 철을 넣으면 갈유(褐釉)와 홍유(紅釉), 코발트를 넣으면 남유(藍釉)가 되는데, 이들은 모두 산화염(酸化焰) 번조(燔造)를 필요로 한다. 유약 표면은 광택이 좋고 투명도도 뛰어나며 평탄하나, 산화납은 인체에 해로운 것으로 유약 속에서 제대로 용융이 안 되는 경우에는 유약 외부로 표출되는 경우도 있어서 주의해야 한다. 또한 유약의 경도(硬度)가 비교적 낮아서 작은 충격에도 잘 견디지 못하며 화학적 안정성이 떨어진다.
연유의 기원은 중국기원설과 이란 등의 서역(西域)기원설이 있다. 이 두 곳의 연유는 각기 산화납을 사용하는 것은 동일하나, 세부적으로는 그 성분 구성이 달라 동시에 발생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 나라와 중국·일본 등의 연유는 성분이 유사하여 동양의 연유는 중국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 확실하다.
중국의 경우, 연유는 대개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처음 등장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후 한대(漢代)에는 녹유를 명기(明器 : 무덤에 함께 넣는 그릇)와 건물 외벽 등에 많이 입혔고, 당대(唐代)에는 당삼채(唐三彩 : 녹·황·청의 세 가지 빛깔로 된 당나라의 도자기)로 그 명성을 날렸으며, 신라의 연유도기(鉛釉陶器)와 일본의 나라(奈良) 삼채도기(三彩陶器)도 이때 영향을 받아 제작된 것이다.
이후 15세기 명대(明代) 들어서면 법화유(法花釉)나 상회(上繪 : 염색한 피륙 위에 그린 그림) 안료의 주성분이 될 정도로 가장 오랜 기간 사용된 유약 중의 하나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고려청자 제작 이후 1000℃ 이상의 고화도(高火度) 유약에 밀려 거의 사용이 되지 않았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조선백자에서 상회 안료를 채택하지 않은 관계로 나타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