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천군 ()

대동여지도 중 경기도 연천 부분
대동여지도 중 경기도 연천 부분
인문지리
지명/행정지명ˑ마을
경기도 중앙 북단에 위치한 군.
정의
경기도 중앙 북단에 위치한 군.
개관

동쪽은 포천시, 서쪽은 경기도 장단군, 남쪽은 파주시·양주시·동두천시, 북쪽은 강원도 철원군과 황해도 금천군에 접하고 있다. 동경 126°39′∼127°10′, 북위 37°57′∼38°17′에 위치한다. 면적은 675.83㎢이고, 인구는 4만 4116명(2019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2개 읍, 8개 면, 96개 행정리(103개 법정리)가 있다. 군청은 경기도 연천군 연천읍 차탄리에 있다.

자연환경

동남쪽에는 광주산맥의 지맥이 지나고 있고 북쪽에는 마식령산맥이 지나고 있어 700∼900m의 높은 산지가 동남과 서북부에 발달하고 있으나 서남부와 남부지역에는 낮은 구릉이 나타나 있다. 그리고 중앙에는 추가령지구대가 남북으로 통과하고 있다.

동쪽에는 고대산(高岱山, 832m)·지장봉(地藏峰, 877m)·향로봉(香爐峰, 600m) 등이, 철원군·포천시와 서쪽에는 환두간(225m)·용호산(308m)이 장단군과 각각 경계를 이루며, 남쪽에는 검악산(675m)·중현산(589m)·마차산(588m)이 양주시, 동두천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중앙에는 고왕산(355m)·조파산(328m)·당해산(272m)이 솟아 있다.

북동부는 낮은 골짜기를 따라 흘러내린 철원 용암대지의 남단에 해당되어 현무암이 나타나 있다. 임진강의 지류인 한탄강은 군의 남부에서 임진강과 합류, 서남류하면서 차탄천·아비천·천산천과 합류한다.

한탄강은 용암대지를 침식하여 협곡을 만들고 현무암의 단애를 곳곳에 발달시키고 있다. 이 지역은 임진강 상류지역으로 임진강은 한탄강과 사이천을 합류하며 서남류한다. 이들 하천과 백학저수지 등은 관개 용수로 이용되고 있다.

임진강과 한탄강 유역의 넓고 평탄한 용암대지는 좋은 경작지로 주로 밭으로 이용되고 있다.

연평균 기온 10℃, 1월 평균기온 -7℃, 8월 평균기온 25℃로 한서의 차가 30℃를 넘어 대륙성 기후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연 강수량은 1,320㎜로 다우지의 하나이다.

역사

전곡읍 전곡리에서 1978년에 구석기시대의 유적지가 발견되었고, 1979∼1983년 6차에 걸친 발굴조사에서 첨두형(尖頭形) 주먹도끼, 타원형(楕圓形) 주먹도끼, 원시형(原始形) 첨두주먹도끼·가로날도끼·양면날찍개·외면날찍개·긁개류 등 다량의 구석기유물이 발견되어 이미 27만 년에서 10만 년 전 사이에 사람이 살았던 지역임이 확인되었다.

특히 전곡리 구석기유적으로 전기 구석기시대 아슐리안(Acheulian)형 석기인 양면핵석기(兩面核石器)·가로날도끼 등이 발견되었다.

신석기시대 유적으로는 중면 삼곶리와 왕징면 무등리, 군남면 삼거리 등지에서 빗살무늬토기편이 발견되어 임진강·한탄강변을 중심으로 곳곳에 신석기시대의 취락지가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청동기시대의 유적은 분포밀도가 크게 증가하여 청동기시대에 이르러 인구가 급격히 늘어났음을 알 수 있게 하는데 연천읍 통현리·차탄리, 전곡읍 양원리·은대리, 백학면 학곡리 등지에서 고인돌이 발견되었다.

삼한시대에는 진번군(眞番郡)의 영향권에 있다가 기원전 82년경 한나라 군현 지배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면서 한강 유역에서 신흥하고 있던 백제의 세력권 내에 속하게 되었다. 그 뒤 고구려의 남진정책으로 연천군 일대가 고구려의 영토로 된 475∼551년에 최초로 공목달현(工木達縣)으로 불렸다.

백제·고구려에 이어 한강 유역을 지배하게 된 신라시대에는 공성현(功成縣)으로 개칭되었으며, 757년(경덕왕 16)에는 철성군(鐵城郡: 지금의 철원)의 영현이 되었다.

한편 마전(麻田) 지역은 고구려 때는 마전천현(麻田淺縣), 신라 때는 임단현(臨湍縣)으로 불렸다. 적성(積城)지역은 고구려 때는 칠중현(七重縣)·칠중성현(七重城縣)으로 불렸으며, 신라 때에 칠중현으로 개칭되어 내소군(來蘇郡)의 영현이 되었다.

삭녕(朔寧) 지역도 본래 고구려 때는 소읍두현(小邑豆縣)이었으나 신라 때에 삭읍(朔邑)으로 개칭되어 황해도 토산군(兎山郡)의 영현이 되었다. 승령(僧嶺)도 고구려 때는 승량현(僧梁縣)이었는데 신라 때 동량현(㠉梁縣)으로 개칭되어 철성현의 속현이 되었다.

고려 태조 때에 장주(障州 또는 獐州)로 개칭되었고. 995년(성종 14) 포천과 아울러 도단련사(都團練使)가 두었다가 1005년(목종 8)에 폐지되었다. 1018년(현종 9) 장주가 다시 동주(東州: 지금의 철원)에 속하게 되었다가 1175년(명종 5) 철원과 분리되어 감무(監務)가 두어졌는데 승령현의 감무가 겸임하였다. 1309년(충선왕 1) 장주의 이름이 바뀌어 오늘날의 지명인 연천(漣川, 漣州)으로 개칭되었다.

또한 마전 지역은 태조 때 마전현으로 개칭되었고, 현종 때 장단의 영내에 속하여 상서도성(尙書都省)의 관리 하에 있다가 1063년(문종 17) 개성부의 직할이 되었으며 예종 때 적성현에 병합되었다가 1389년(공양왕 1) 다시 분리되어 감무가 두어졌다.

적성 지역은 태조 때 적성현으로 개칭되었고, 현종 때 장단군 임내에 속하여 상서도성의 관장 하에 있기도 하였다. 문종 때에 다시 개성부 직할로 되었다가, 1106년(예종 1) 다시 분리되어 감무가 배치되기도 하였다.

삭녕 지역도 태조 때 삭녕현으로 개칭되었고, 예종 때 승령현에 감무가 배치될 때 삭녕이 이에 속하게 되었다. 승령도 태조 때 승령현으로 되어 삭녕현과 함께 철원 임내에 속했다가 다시 분리되었다.

조선시대인 1413년(태종 13) 연천현감이 배치되었으며, 1414년 마전현이 병합되어 마련현(麻漣縣)으로 되었다가 다시 분리되어 연천현으로 하였다. 현종 때에 이르러 다시 마전과 병합되었다가 1684년(숙종 10) 연천현이 되었다.

또한 마전 지역은 태종 때 마전현감이 임명되기도 했으며, 1452년(문종 2)에는 숭의전(崇義殿)이 있는 고장이라 하여 마전군으로 승격되었다.

적성 지역은 태종 때 현감이 배치되어 1895년(고종 32)까지 계속되었다. 승령현도 태종 때에 신의왕후(神懿王后)의 외가 고장이라 하여 승격되어 지군사(知郡事)가 두어지기도 하였다.

1907년 철원군의 일부가 병합되어 연천군이 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마전·적성의 2개 군과 삭녕군의 대부분 및 양주군의 일부가 분할되어 연천군에 편입, 병합되었다.

1945년 8·15광복 후 국토분단으로 인해 적성면·남면 전부와 백학면·전곡면 일부는 38도선 이남에 속했고, 연천군 관인면·중면·삭녕면·서남면·왕징면·미산면·군남면 전부와 백학면·전곡면 일부는 38도선 이북에 속하게 되었다. 그 뒤 1950년 6·25전쟁을 겪으면서 1951년 5월 38도선 이북지역에 있던 대부분의 지역이 탈환되었다.

1954년 4월 15일 이후 군정 하에 있다가 이 해 10월 20일자로 공포된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에 의거해 전곡면·백학면·군남면·연천면·관인면·미산면·중면·왕징면 등 8개 면이 이 해 11월 17일자로 행정상 완전히 수복되었다.

1963년 1월 1일 파주군 적성면의 눌목리가 전곡면에, 삼화리가 미산면에, 강원도 철원군 신서면이 연천군에 각각 편입되었고, 1965년 4월 30일 백학면에 원당출장소가 설치되었으며, 1979년 5월 1일 연천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3년 2월 15일 관인면 일원이 포천군에, 포천군 청산면 초성리·대전리·장탄리·궁평리·백의리가 연천군 청산면에 편입되었으며, 1985년 10월 1일 전곡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7년 1월 1일 미산면 석장리가 백학면에 편입되었고, 1989년 1월 1일 포천군 관인면 부곡리가 연천읍에 편입되었으며, 4월 1일에는 백학면 원당출장소가 장남면으로 승격되었다. 1998년 8월 백학면의 두현리와 통구리를 행정리로 수복하였다.

유물·유적

서기전 50∼10만 년경의 돌망치·주먹도끼를 비롯한 구석기 유물이 발굴된 전곡읍의 연천 전곡리 유적(사적, 1979년 지정)와 중면의 연천 삼곶리 돌무지무덤(경기도 기념물, 1994년 지정) 등 선사유적들이 발굴되어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는 곳이다.

청동기시대 유물로는 백학면의 연천 학곡리 고인돌(경기도 기념물, 1996년 지정), 연천읍의 연천 통현리 지석묘(경기도 문화재자료, 1983년 지정)와 전곡읍 양원리 지석묘가 있다.

성지로는 청산면 대전리 성지(大田里 城址, 일명 買哨城址), 장남면 원당리에 연천 호로고루(사적, 2006년 지정), 미산면 동이리에 연천 당포성(사적, 2006년 지정), 전곡읍 은대리에 연천 은대리성(사적, 2006년 지정), 후삼국시대의 보개산성(일명 弓裔城), 고려시대의 옥녀봉성지와 군남면 삼거리 성지(일명 水鐵城址)·옥계리 성지, 연천읍 차탄리 성지, 임진왜란 때 축성되었던 청산면 초성리 성지가 있다.

중면의 우화정(羽化亭), 연천읍 차탄리에 태봉봉수와 군남면 왕림리에 봉화봉봉수(烽火峰烽燧) 등은 6·25전쟁 중에 파괴되고 소실되었다.

능묘로는 장남면 고랑포리에 연천 경순왕릉(사적, 1975년 지정), 미산면 아미리의 연천 숭의전지(사적, 1971년 지정)·잠두봉 시암벽(蠶頭峰 詩巖壁), 청산면 궁평리에 조선 인조의 왕자인 낙선군 묘(樂善君 墓), 미산면 백석리에 정발장군 묘(경기도 기념물, 1979년 지정), 백학면 두일리에 박진장군 묘(경기도 기념물, 1987년 지정), 왕징면 강서리에 미수 허목 묘역(경기도 기념물, 2002년 지정) 등이 있다.

불교유적으로는 신서면 내산리에 심원사(深源寺)가 있었으나 건물은 6·25전쟁 중에 소실되었고 연천군 심원사지 부도군(경기도 유형문화재, 1991년 지정)과 석대암(石臺庵)의 지장영상(地藏靈像) 등이 남아 있다. 그리고 연천읍 고문리에 오봉사지 부도(경기도 유형문화재, 1986년 지정), 왕징면 기곡리 사지에 석불좌상이 있다.

유교문화재로는 연천읍 읍내리의 연천향교, 동막리에 임장서원(臨漳書院), 장남면 고랑포리에 임강서원지(臨江書院址, 일명 四賢祠), 미산면 아미리에 미수서원지(眉叟書院址), 마전리의 노동에 고려 말의 대학자 이색(李穡)의 영정을 모신 목은영당(牧隱影堂), 왕징면 강서리 군영장(軍營場)이 있다.

또한 조선 숙종이 허목(許穆)에게 하사한 은거당(恩居堂)이 있다. 연천읍 통현리에는 김홍주(金弘柱)를 시조로 하는 강릉김씨 집성촌이 있는데, 이곳은 명종·숙종·경종의 3대에 걸쳐 판서에 오른 인물이 8명이 있어 팔판서마을[八判書村]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전적지 및 기념비로는 군남면 왕림리의 충혼탑, 신서면의 대광리 전투기념비(大光里 戰鬪記念碑), 청산면 초성리의 38도선돌파기념비 등의 6·25전쟁 전적기념물이 있다. 연천읍 차탄리 연천역 구내의 연천역 급수탑(경기도 등록문화재, 2003년 지정)은 1914년 경원선 개통시에 건립된 것으로 탑신의 많은 탄흔은 6·25전쟁이 치열했음을 대변해주고 있다.

천연기념물로 전곡읍 은대리에 은대리 물거미 서식지(천연기념물, 1999년 지정)가 있고, 유서 깊은 나무로는 수령이 500년 된 숭의전 느티나무, 수령이 300년 이상 된 군남면 남계리의 물푸레나무, 전곡읍 천파리의 은행나무·느티나무, 연천군청내의 향나무 등이 있다.

교육·문화

조선시대 교육기관으로 1398년(태조 7) 지금의 연천읍 읍내리에 연천향교가 창건되고 이어서 중면에 삭녕향교, 미산면에 마전향교가 각각 창건되었다. 1419년(세종 1)에는 연천향교에 30명, 삭녕향교와 마전향교에 각 50명 정도의 유생이 수학하고 있었다.

조선 중기 이후 서원이 건립되어 지방교육을 담당했는데, 효종 때 지금의 장남면 고랑포리에 임강서원, 1690년(숙종 16)미산면 아미리에 미수서원, 1700년 연천읍내에 임장서원이 세워져 서원철폐령이 내려질 때까지 많은 유생을 교육시켰다.

근대 교육기관으로 1911년 연천향교 자리에 연천보통학교와 1919년 장남면 고랑포리에 고랑포보통학교가 설립되었는데, 현재 이들 학교는 연천초등학교와 고랑포초등학교로 개명되어 차탄리와 원당리에 위치해 있다. 1920년대에 연천실업보습학교(漣川實業補習學校)가 설립되었고, 1956년 연천중학교가, 1958년 연천실업고등학교가, 1974년 인문계고등학교인 전곡고등학교가 개교되었다.

교육기관으로는 2015년 현재 초등학교 13개교, 중학교 6개교, 고등학교 2개교가 있다.

문화시설로는 1986년에 개원된 연천문화원이 있고, 군립도서관의 건립도 계획되고 있다.

이곳은 647년(진덕여왕 1)에 건립된 심원사와 오봉사를 중심으로 불교가 성하던 곳이었으나 이들 고찰(古刹)이 소실된 6·25전쟁 이후 침체되었다. 개신교는 1920년대 남감리교파가 전파된 이후 교세가 더욱 확장되었다. 천주교는 1958년 전곡공소(全谷公所)가 설치되어 1979년 서울대교구 소속의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민속

이 고장의 민속놀이로는 미산면 아미리에서 전승되는 울어리놀이와 백학면과 미산면 등지에서 행해지던 호미씻이놀이가 있다.

울어리놀이는 이 지역이 고려 때 마전군에 속해 있을 무렵부터 전승되어왔다고 하나 문헌상의 기록은 없다. 다만 이 놀이에 등장하는 배역의 호칭이 영좌·부사로 불린 점으로 보아 그 연원이 깊음을 짐작할 따름이다.

울어리놀이는 노동요를 부르면서 진행되는데, 그 과정은 풋나무베기·남여행차·마당놀이로 구분된다. 오곡이 풍성한 추수 전 산마을 주민들은 산에 모여 농요를 흥겹게 부르면서 겨울에 쓸 땔감을 벤다. 그러다 석양이 질 무렵이면 잡목으로 남여(籃輿: 가마의 일종)를 만들어 마을의 연장자를 영좌(令坐)로 삼아 여기에 태우고 마을로 돌아온다.

남여의 행렬이 길놀이를 벌이며 마을에 도착하면 부농(富農)을 골라 그 집 마당에서 풍년을 구가하며 농악과 소리에 맞추어 한 바탕 마당놀이를 벌인다. 그러면 주인은 음식을 마련하는데, 주민들은 이를 먹고 즐기면서 서로의 화합을 돈독히 한다.

호미씻이는 마을청년을 중심으로 농번기에 어려운 일을 협동으로 한 데서 유래된 것으로 농삿일이 거의 끝나는 7월에 길일을 택해서 행한다. 이 날이 되면 마을에서는 농기를 한데 모아놓고 술과 음식을 마련하여 이번 농사의 노고를 서로 위로하며 한바탕 놀이를 벌이게 된다.

동제로는 일명 고창굿으로 불리는 진좌제(鎭坐祭)가 장남면 고랑포리에 있는 부군당(府君堂)에서 거행된다. 3년마다 음력 2월 초에 길일을 택해 나흘간 진행되는데, 제사에 소요되는 비용은 그 해의 풍흉에 따라 각 집에서 갹출된다.

굿이 진행되는 기간에는 20∼30척의 배에 홍·백·황·녹색의 깃발 수십 개가 세워져 장관을 이룬다. 2주간의 준비기간 동안 취군으로 불리는 약 50명의 장정이 종이로 만든 흑관(黑冠)을 쓰고 태평소·장구·북·꽹과리·징 등의 악기를 울리며 풍물놀이를 벌이면 축제분위기가 고조된다.

젯날이 되면 부군당에서 무(巫)의 집전(執典)으로 엄숙한 항례제(恒例祭)의 막이 오르고, 제전이 끝나면 지방인사·취군·무동(舞童)들이 큰길로 나가 행렬을 짓고 모여든 군중들과 합세하여 춤과 노래의 한마당을 벌인다. 이 진좌제는 상고랑포에서 이틀, 하고랑포에서 이틀 도합 연 나흘 동안 온 마을에서 떠들썩하게 벌어진다.

설화·민요

이 고장에는 지리적 조건상 산·고개·바위·하천에 연관된 지명전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한탄강에 있는 ‘삼형제바위’에 얽힌 전설은 홀어머니와 아들 삼형제에 대한 이야기이다. 삼형제가 한탄강에서 물놀이를 하던 중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막내를 구하기 위해 큰형이 뛰어들었다가 함께 떠내려가게 되자, 둘째까지 뛰어들었다가 삼형제 모두 익사하고 말았다.

어머니는 그 뒤 날마다 강가에 나와 자식들을 생각하며 비탄에 빠져 있었는데,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전에 없던 큰 바위 세 개가 강 한가운데로 솟아 올랐다. 어머니는 죽은 자식들을 보는 것같이 기뻐하였고 마을사람들은 이 바위를 ‘형제바위’라고 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백학면 백령리와 두일리 경계의 산봉우리에 있는 ‘꽃바위’는 두일리의 부녀자들을 바람나게 하는 바위라고 한다. 두일리에 부임해온 원의 부인이 바람이 나자, 원은 부인을 처형하여 꽃바위가 있는 산에 묻고 꽃바위를 흙으로 덮어버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백령리의 주민들이 질병을 앓고 가축들이 폐사하는 등 우환이 닥쳐왔다. 다시 꽃바위는 백령리 주민들에 의해 파헤쳐졌고 이번에는 두일리 원의 둘째 부인이 바람이 나서 처형되었다. 이러한 과정이 열 차례나 반복되어 꽃바위 봉우리 능선에는 원의 부인 분묘 10구가 즐비하게 남아 있어 오늘날 「열묘각시꽃봉전설」을 전해주고 있다.

그 밖에 태고적에는 선녀가 놀았으며, 고려 때는 어느 장사가 하룻밤 사이에 성을 쌓았다는 「옥녀봉전설」이 있다. 또한 민족항일기에 온천수가 나와 다른 지역 사람들이 몰려들자, 이것을 싫어하여 도인에게 부탁해서 온천수를 나오지 못하게 했다는 옥녀봉 뒤편의 ‘온수동’에 얽힌 전설은 손님오는 것을 막았다가 패가한 「장자못전설」과 비슷하다.

또한 삼신할멈이 살았다는 ‘군자산’은 고구려 때 ‘공목달현웅섬산’이라고 불리다가 뒤에 ‘당산’이라 불렸다. 하늘에 제를 지내는 곳이기도 한 신성한 이 산은 고을의 액운을 막아주었고 알맞은 비를 내리게 해주었다고 전한다. 연천의 역사는 이 산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고 믿어지고 있다.

그 밖에도 선녀를 보려고 오르다가 실패하여 바위 앞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는 청년의 이야기가 얽힌 「선바위전설」, 청산면의 ‘선봉바위’와 연관된 「장자못전설」, 강릉김씨 시조 김양남(金楊南)이 나라를 걱정했던 곳이라고 전하는 「국사봉전설(國思峰傳說)」 등 많은 전설이 있다.

전승되는 민요는 노동요·의식요·타령요가 있는데, 노동요가 가장 많고 그 중에 「모내기소리」와 「논매기소리」가 중심이 되고 있으나 「밭갈이노래」와 「울어리」(나무베는 노래)는 특색 있는 노래이다.

“허나허나 한알기로구나”로 받는 소리를 가진 「모내기소리」가 있고 그 밖에 “어느장군 끼워줄까/닐릴릴 끼워주자/닐릴릴 끼워주자/어느친구 끼워주나……” 하는 「모내기소리」도 있다.

또한 소를 몰면서 노동의 행위 및 지시·신세·소망 등을 노동의 속도에 맞추어 부르는 「밭갈이노래」는, “이러디요 전소야/굵은돌은 넘겨집고/작은돌은 멀어딛지/일러지마/사래차고 긴밭이랑으로/어느때나 다갈고가나……”처럼 대화하듯 한다.

연천민요의 특색을 보여주는 「울어리」는 세개의 부분으로 불린다. “올라가리/오호 오호/벼린봉 올라가리/오호 오호/십년묵은 물가닥나무가 막돌아간다/에 어허 연해연방 또다시 올라가네/오호 오호……”하는 ‘풋나무베기’는 나무베는 일을 할 때 부른다.

일을 끝내고 잡목과 칡으로 남여(가마)를 만들어 연장자를 태우고 마을로 가는 길놀이를 하면서 부르는 ‘남여행차’에서는 “에헤 끼룩 끼룩/좌상님 고이고이 모셔라/에라이놈 물러까라 칠라까라……”라고 한다.

부잣집 마당에 당도하여 마당놀이를 하면서 부르는 ‘마당놀이’부분은, “남여부사 출두하셨으니 물러까라 칠라까라/날이 저물었으니 이집에서 하룻저녁 쉬어갈수 있는지 여쭈어라……”라고 한다.

나무베기할 때의 「톱질노래」는 “올라가네 상상봉 대마루턱으로 올라가네/오오오 오오오……잡목은 무성하고 잡풀은 돌아가네/오오오 오오오/금년에도 풍년이니 농가마다 풍요하네……”라고 부른다. 또, 집을 짓기 위해 터를 닦고 땅을 다지며 부르는 “당겼나 당겼지” 하는 후렴의 「가래질소리」와 “에이어라 지경이요” 하는 「지경소리」가 있다.

그 밖에 어린이들이 놀이하면서 부르는 동요가 많고 “……오메더라 오메더라/뒷동산에 고목나무/싹이트면 오시려나……”하는 사모의 노래도 있다.

산업·교통

토지의 60.9%가 임야이고 19.8%가 경지로 경지 중 논은 5,537㏊, 밭은 7,852㏊로 농업용수는 백학저수지에서 공급되고 있다. 주요 농작물은 쌀·보리 등 주곡 이외에 잡곡·고추·담배·배추·무 등이 생산되고 있다. 최근에는 용암대지를 개발하여 사과·배·복숭아 등과 같은 과수재배와 인삼재배가 활발하다.

농가인구는 전체인구의 23.4%이고 제조업 인구는 2.9%이다. 과거에는 석탄·강옥 등이 생산되었으나 최근에는 폐광되었으며, 현무암을 원료로 하는 돌절구·멧돌 등이 연천읍과 전곡읍에서 생산되고 있다.

주요 광산물로는 규석과 석회석이 생산되고 있다. 수도권 인구의 증가로 도시 지역내의 산업이 교외지역으로 이전되면서 한탄강 주변으로 많은 수의 공장이 이동, 입지하였다. 주요 공업은 비금속 공업·식료품 공업·조립 금속 공업·섬유공업 등이다.

상업 활동은 연천장이 2·7일, 전곡장이 4·9일 등 5일장이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었으나 현재는 많이 쇠퇴하였으며 전곡과 연천에는 상설시장도 열리고 있다. 정기시장에서는 지역에서 생산되는 농산물과 도시에서 생산된 일용품·의류·해산물·곡류 등이 교류되고 있다. 그리고 전곡에는 우시장이 4·9일에 열리고 있으나 매매량은 많지 않다.

도로는 국도 3호선이 전곡읍·연천읍을 남북으로 지나고 있으며 국도 37호선이 서남북에서 동북진하여 전곡에서 동진하고 있다. 그리고 지방도 322·324호선이 동서로 지나고 국도 3호선과 합류하고 있어 지역 내 교류를 촉진시키고 있다. 철도는 경원선이 국도 1호선과 나란히 남북으로 지나고 있다.

한탄강가에는 많은 유원지가 발달하고 있는데 주말이나 휴가 때에 관광객들로 붐비고 최근에는 여행객수가 계속 늘고 있다. 그리고 평화로(국도 3호선, 의정부∼동두천구간)는 주말에는 관광객들로 교통지체가 심각한 도로의 하나이다.

관광

군의 중앙에는 추가령구조곡이 남북으로 지나가고 있어 동쪽으로는 광주산맥의 지맥이 뻗어 지장봉을 비롯한 산악관광지가 발달하고 서북부쪽으로는 마식령산맥의 지맥이 뻗어 수룡산을 비롯한 산악관광지가 발달하였다.

하천은 임진강이 구조곡을 남류하여 한탄강과 합류하여 서남쪽으로 흐르면서 관광지형을 발달시켰다. 이 군의 북반부는 현무암의 용암으로 덮혀 있어 용암대지를 형성하면서 한탄강 및 연천 하류에서 주상절리를 발달시켜 하천 유역의 전경을 이룬다.

이러한 연천과 한탄강 유역은 여름철 피서관광지로 유명하다. 특히, 서울 시민들의 피서관광지와 청소년들의 야영관광지로 각광 받고 있다. 중요한 관광명소로서는 보개산·문인석·문인폭포·우화정·풍혈·훈암벽·운계동·청학동계곡·연취암·군자산·감악산·용추계곡과 폭포·숭의전·칠중성 등을 들 수 있는데, 여름이면 수도권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다.

읍·면
  1. 연천읍(漣川邑)

군의 동단에 위치한 읍. 면적 87.98㎢, 인구 8,138명(2019년 현재). 읍 사무소는 차탄리이다.

본래 연천군 지역으로 연천읍내가 되므로 군내면이라 하여 읍내·지혜·차탄 등 6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동면(東面)과 철원군 신서면(新西面) 신순리(新順里) 일부, 남면(南面) 진전리(榛田里) 일부, 그리고 양주군 영근면(嶺斤面) 명천리(明川里) 일부가 통합되어 9개 리로 편성되었고 군내면이라 하였다가 1937년 연천면으로 개칭되었다.

1945년 38도선 이북에 속하였다가 1954년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에 의해 행정권이 수복되었으며, 1979년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9년 포천군 관인면 부곡리가 편입되어 10개 리가 되었다.

동쪽에는 종자산(種子山, 643m), 서쪽에는 군자산(君子山, 328m)이 솟아 있고 그 여맥이 읍내로 이어져 있으며, 산지 사이에 남북으로 추가령지구대가 지난다. 이 지구대 사이에서 차탄천(車灘川)·통현천(通峴川)이 합류하여 한탄강(漢灘江)으로 흘러들며, 이들 하천유역에 취락과 농경지가 발달하였다.

전체면적 중 2/3가 임야이나, 밭의 면적이 논의 면적보다 넓다. 주요 농산물은 쌀·옥수수·메밀·콩 등이다. 그 밖에 배추·무의 생산량이 특히 많고 수박·오이 재배도 활발하다.

교통은 경원선이 연천역을 통과하며, 이와 병행하여 3번 국도가 동두천과 신서면으로 연결된다. 316번 지방도가 남부를 가로지르며 이 밖에 차탄리를 중심으로 3·6번 군도가 있다.

문화유적은 고문리에 오봉사지 부도, 통현리에 연천 통현리 지석묘, 읍내리의 연천향교, 동막리에 임장서원지, 차탄리에 성지·태봉봉수지·연천역 급수탑(漣川驛 給水塔) 등이 있다. 고문리의 재인폭포(才人瀑布), 풍혈(風穴)이 있는 동막리의 동막골 등지는 향락철에 수만 명의 관광객들이 북적대는 관광명소이다.

차탄(車灘)·현가(玄加)·상(上)·와초(瓦草)·옥산(玉山)·읍내(邑內)·동막(東幕)·통현(通峴)·고문(古文)·부곡(釜谷) 등 10개 리가 있다.

  1. 전곡읍(全谷邑)

군의 남단에 위치한 읍. 면적 55.16㎢, 인구 1만 9,241명(2019년 현재). 읍 소재지는 은대리이다.

본래 양주군 지역으로 영근면(嶺斤面)이라 하여 은대·명천·전곡 등 11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적성군 동면(東面) 적암리(赤巖里) 일부가 통합되어 7개 리로 개편되었고 연천군에 편입되었다가 1941년 전곡면으로 개칭되었다. 1945년 38도선 이남 지역인 양원리(兩遠里)·간파리(干坡里)는 파주군 적성면(積城面)에 편입되었고 38도선 이북에 위치한 전곡(全谷)·은대(隱垈)·신답(薪沓)·고릉(高陵)·마포(馬浦) 등 5개 리는 북한 지역으로 편입되었다.

1954년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에 의해 38도선 이북의 5개 리에 대한 행정권이 수복되었으며, 이후 적성면의 양원리·간파리가 복귀되었고, 1963년 파주군 적성면 늘목리(訥木里)가 편입되었으며, 1985년 읍으로 승격되었다.

남쪽 경계에 마차산(磨叉山 혹은 馬車山, 588m)과 감악산(紺嶽山, 675m) 등이 있어 그 산세가 읍내로 넓고 길게 드리워져 있는 형세다. 군 인구의 2/5가 집중된 곳으로 가구 및 주택수·업체수도 제일 많고, 각종 의료시설이 위치한, 군에서 가장 발전한 곳이다. 전체면적 중 임야가 3/5이 넘고 농경지도 일부 분포한다.

주요 농산물은 쌀 이외에 밀·콩·채소 등인데, 특히 밀의 생산량은 군내에서 독점적이다. 또한 참깨·땅콩 등의 특용작물과 배·포도 등의 과실류 생산도 많다.

교통은 경원선이 전곡역을 지나며, 문산과 포천으로 연결되는 37번 국도가 면의 중앙을 횡단하고 서울과 연결되는 3번 국도가 면의 북단쪽으로 종단한다. 또한, 322번 지방도가 북중앙을 횡단하며 368번 지방도가 면의 남단을 종단하는 등 도로망이 정비되어 있는 편이다.

문화유적은 전곡리에 선사유적지, 양원리에 지석묘와 좌승지를 역임한 방망지(方網之) 묘, 간파리에 남순하(南舜夏)의 효자정문·열녀 청풍김씨의 정려문 등이 있다. 관광지로는 전곡리 한탄강 철교 아래 약 15만 평의 한탄강국민관광지가 있는데, 맑은 물과 주위의 아름다운 경관이 어우러져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 시민들의 여름 휴양지로 이름높다.

은대(隱岱)·전곡(全谷)·신답(新畓)·고릉(高陵)·양원(兩遠)·간파(干坡)·늘목(訥木)·마포(馬浦) 등 8개 리가 있다.

  1. 군남면(郡南面)

군의 중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45.64㎢, 인구 3,350명(2019년 현재). 면 소재지는 삼거리이다.

본래 연천군 지역으로 연천읍내의 남쪽이 되므로 남면이라 하여 진전·옥계·세곡 등 10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마전군(麻田郡) 화진면(禾津面)과 연천군 남면(南面)이 통합되어 군남면이 되었다. 1945년 38도선 이북에 위치하여 북한의 통치 하에 있다가 1954년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에 의거해 행정상 수복되었다가 1959년에 면 전역에 걸쳐 입주가 이루어졌다.

동쪽으로는 연천읍과의 경계에 군자산이 남북으로 뻗어서 각처에 구릉을 형성한다. 서쪽 경계에는 임진강, 남쪽에는 한탄강이 면 경계를 형성하며 물줄기가 이어진다. 면 전체가 대체로 평지이고, 특히 임진강 유역을 중심으로 농경지가 발달하였다. 논과 밭의 비율이 거의 같다.

주요 농산물은 쌀을 비롯하여 콩·팥 등 잡곡과 고구마·감자·수박·참외·배추·무 등 각종 채소류, 그리고 땅콩을 들 수 있다. 특히, 쌀의 생산량은 군내에서 가장 많다.

교통은 322번 지방도가 면의 남단을 동서방향으로 횡단하고 324번 지방도가 북서쪽으로 달리면서 3번 국도와 연결된다. 그 밖에 1·6·7번 군도가 중앙과 북부지역을 잇는 가교역할을 한다. 문화유적은 옥계리에 성지, 삼거리에 성지, 왕림리에는 봉화대의 흔적이 봉수산(烽燧山)에 남아 있다. 진상리 일대의 임진강 줄기에 관광지가 개발되어 있다.

삼거(三巨)·진상(進祥)·옥계(玉溪)·왕림(旺林)·선곡(仙谷)·남계(楠溪)·황지(黃地) 등 7개 리가 있다.

  1. 미산면(嵋山面)

군의 중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41.26㎢, 인구 1,754명(2019년 현재). 면 소재지는 유촌리이다.

본래 마전군(麻田郡) 지역으로 마전읍내가 되므로 군내면이라 하여 읍부·월곡·동부 등 8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동면(東面) 8개 리, 서면(西面)의 5개 리, 그리고 북면(北面) 1개 리 등이 병합되어 아미산(峨嵋山)의 이름을 따서 미산면이 되었다. 1945년 북한 지역에 소속되었다가 1954년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에 의해 행정권이 수복되었다. 1963년 파주군 적성면 삼화리가 편입되었고, 1987년 석장리(石墻里)가 백학면으로 이관되었다.

북쪽에 있는 산지 일부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구릉지대이며, 임진강이 동부에서 남류하다가 곡류하여 남서쪽으로 흐르고 그 유역에 평지가 발달했다. 전체면적 중 농경지가 30% 정도이며, 논농사보다 밭농사가 우세한 지역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수수·콩·팥·녹두·고구마·감자·배추·양배추·고추 등인데, 특히 고추의 생산량이 제일 많다. 또한 들깨와 땅콩 등을 비롯한 특용작물의 생산도 활발하다.

교통은 전곡읍과 백학면을 연결하는 322번 지방도가 면의 중앙을 횡단하고, 그 주위에 기타 도로가 뻗어 있다.

문화유적은 아미리에 숭의전지(崇義殿)·영원부원군(領原府院君) 윤호(尹壕)의 묘와 고려 때의 무신인 심덕부(沈德符)의 묘, 백석리에 정발장군 묘가 있다. 그 밖에 마전리에는 목은영당, 유촌리에는 신호(申浩)의 묘가 있다. 한편, 아미리에 어수정과 아미리 옻샘이 있는데, 이곳의 약수는 신비한 효험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유촌(柳村)·아미(峨嵋)·백석(柏石)·동리(東梨)·마전(麻田)·우정(牛井)·삼화(三和)·광동(廣洞) 등 8개 리가 있다.

  1. 백학면(百鶴面)

군의 남서쪽에 위치한 면. 면적 67.48㎢, 인구 2,740명(2019년 현재). 면 소재지는 두일리이다.

본래 적성군 지역으로 적성읍내의 북쪽이 되므로 북면이라 하여 장곡·고촌·맹동 등 11개 리를 관할하다가 1895년(고종 32)에 마전군(麻田郡)에 편입되어 하신면이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장단군 장신면(長新面) 2개 리의 일부, 대위면(大位面)·장현내면(長縣內面)·고남면(古南面)의 각 일부가 병합되어 백학산의 이름을 따서 백학면이 되었다. 1945년 파주군 적성면으로 행정구역이 바뀌었다가 1954년에 행정권이 수복되면서 연천군 관할 하에 놓였다.

해방 이후 파주군 지역의 노곡리·학곡리가 다시 편입되었으며, 1963년 장단군 장도면(長道面) 9개 리, 대강면(大江面) 1개 리, 장남면(長南面) 3개 리가 편입되었다. 1965년 원당출장소가 개설되어 구 장남면 지역을 관할하였고, 1989년 원당출장소가 장남면으로 승격, 분리되었다. 1987년에 미산면 석장리가 편입되었다.

북서쪽에 용호산(龍虎山, 308m)·망해산(望海山, 272m)이 솟아 있으며, 남동쪽에는 임진강이 파주시와 접하면서 서쪽 방향으로 흐른다. 동쪽의 석장천(石墻川)과 중앙을 가로지르는 사미천(砂尾川)이 임진강으로 흘러드는데 이들 하천유역에 취락이 조성되었다. 농경지는 주로 사미천 유역에 펼쳐져 있으며 경지면적 중 논과 밭의 비율이 거의 유사하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를 비롯한 잡곡과 콩·팥 등의 두류, 고구마·감자 등의 서류, 수박·참외·오이·배추 등의 채소류의 생산량이 많다. 그리고 참깨·들깨·땅콩 등의 특용작물과 복숭아·포도 등의 과실류 생산도 활발하다.

교통은 322번 지방도가 전곡읍과 장남면을 연결하면서 면의 동쪽을 경유하고, 323번 지방도가 남동쪽에서 북쪽으로 종단한다. 문화유적은 두일리에 박진(朴晋)장군 묘, 학곡리에 고인돌이 있다.

두일(斗日)·백령(百嶺)·전동(箭洞)·노곡(蘆谷)·학곡(鶴谷)·구미(九尾)·석장(石墻)과 주민미거주지역의 두현(頭峴)·갈현(葛峴)·포춘(浦春)·석주원(石柱院)·오음(梧陰)·사시(沙是)·매현(梅峴)·두매(杜梅)·통구(通口)·항동(項洞)·상(上)·중(中)·하(下)·고읍(古邑) 등 21개 리가 있다. 이 중 11개 리는 미수복 상태였다가 1998년 8월 두현리와 통구리가 행정리로 수복되었다.

  1. 신서면(新西面)

군의 북동쪽 북단에 위치한 면. 면적 147.79㎢, 인구 2,876명(2019년 현재). 면 소재지는 도신리이다.

본래 강원도 철원군 지역으로 신서면이라 하여 금곡·도랑·답곡 등 10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5개 리를 관할, 1940년에 대광면(大光面)으로 개칭되었다가 1945년 다시 신서면이 되었다. 1954년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에 따라 주민들의 입주가 이루어졌으며, 1963년 강원도 철원군에서 경기도 연천군으로 편입되었다.

북쪽 중앙에 천덕산(天德山, 477m), 동쪽 경계에 고대산(高臺山, 832m)·지장봉(地藏峰, 877m) 등 비교적 고봉들이 도처에 솟아 있다. 면 중앙을 종류하는 차탄천을 중심으로 답곡천·마전천 유역에 경작지와 취락이 발달해 있다.

면의 면적이 군 전체에서 가장 넓으나 휴전선과 인접한 관계로 농경지를 비롯한 개발지역이 면의 중남부로 제한되어 있다. 전체면적 중 농경지가 1/5 정도를 차지하며, 논농사보다 밭농사가 압도적으로 우세한 지역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을 비롯하여 옥수수·메밀·감자·오이·배추·무·파 등이며, 젖소 사육과 양봉이 활발하다. 답곡리에 규석을 생산하는 광산이 1개 있다.

교통은 경원선이 대광리역을 지나 종착역인 신탄리역까지 이어진다. 이와 병행하여 3번 국도가 면 하단에서 북동쪽을 지나 철원군으로 연결되며, 그 밖에 3번 군도가 면 동부를 종단한다. 문화유적은 내산리에 연천군 심원사지 부도군(漣川郡 深源寺址 浮屠群), 답곡리에는 조선 중종 때의 무신인 김우서(金禹瑞)의 묘가 있다. 특히 대광리에는 휴전선에서 9.5㎞ 떨어진 경원선 철도의 종단점에 ‘철도는 달리고 싶다’는 푯말이 통일에 대한 간절한 염원을 간직한 채 끊어진 철길 앞에 세워져 있다.

도신(道新)·대광(大光)·내산(內山)·신현(薪峴)·갈현(葛峴)·덕산(德山)·도밀(道密)·승양(承陽)과 주민미거주지역의 마전(馬田)·답곡(畓谷) 등 10개 리가 있다.

  1. 왕징면(旺澄面)

군의 서북단에 위치한 면. 면적 71.16㎢, 인구 1,044명(2019년 현재). 면 소재지는 무등리이다.

본래 마전군 지역으로 마전읍내의 북쪽이 되므로 북면이라 하여 무릉상·무릉하·외곡 등 8개 리를 관할하였다가 1895년에 장단군 강신면의 7개 리가 병합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북면(北面) 9개 리, 연천군 서면(西面) 6개 리, 그리고 장단군 대위면(大位面) 나부리(羅浮里) 일부가 병합되어 강신면의 고왕리와 북면의 징파리의 이름을 따서 왕징면이 되었다. 1945년 북한 행정구역 안에 있다가 1954년 행정권이 수복되면서 연천군 관할 하에 놓였다. 이후 남방한계선 위쪽의 7개 리가 행정구역 안에 포함되면서 오늘에 이른다.

면의 중앙에 고왕산을 비롯하여 대체로 산지가 많다. 북쪽에서 동쪽으로 계속 이어지는 임진강이 면계를 형성하며, 안월천·노동천 유역에 평지와 함께 취락이 분포한다. 전체면적 중 농경지 면적은 협소한 편이며, 논농사보다 밭농사가 우세하다.

주요 농산물은 쌀을 비롯하여 수수·콩·팥 등이며, 수박·토마토·배추·땅콩 등도 생산된다.

교통은 324번 지방도와 8번 군도가 있지만, 도로 포장율이 미미한 관계로 대체로 불편한 편이다. 문화유적은 강서리의 은거당(恩居堂), 기곡리의 사지(寺址)에는 석불좌상이 있으며, 가천리에는 관음사지가 있다.

무등(無等)·노동(蘆洞)·북삼(北三)·동중(東中)과 주민미거주지역의 강내(江內)·강서(江西)·고잔상(高棧上)·고왕(高旺)·고잔하(高棧下)·기곡(基谷)·작동(鵲洞)·임강(臨江)·오탄(俉炭)·귀존(貴存)·고장(古蔣)·장학(獐鶴)·가천(佳川)·냉정(冷井) 등 18개 리가 있다.

  1. 장남면(長南面)

군의 서남단에 위치한 면. 면적 35.72㎢, 인구 736명(2019년 현재). 면 소재지는 원당리이다.

본래 적성군 지역으로 북면이라 하다가 1895년 마전군에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장단군 장서면(長西面) 3개 리, 장현내면(長縣內面) 2개 리, 고남면(古南面) 원당리, 장북면(長北面) 항동리(項洞里) 일부와 마전군 하신면(河新面) 2개 리의 일부가 병합되어 5개 리로 구성되면서 장단군 장남면이라 하였다. 1962년 ‘수복지구임시조치법’에 따라 연천군에 편입되었으며, 1965년 백학면 원당출장소가 만들어져 이 지역의 행정을 관할하였다. 1989년 원당출장소가 장남면으로 승격되었다.

남으로는 임진강이 파주시와 접하면서 흐르고, 동북쪽으로는 사미천이 백학면과의 경계를 이루면서 물줄기가 이어진다. 대부분의 지역이 민간인 통제선 북방지역으로 인구밀도가 중면 다음으로 낮은 곳이다. 임진강변에 광활하게 펼쳐진 넓은 평야와 함께 풍부한 수원을 자랑하여, 군 전체에서 밭농사보다 논농사가 우세한 유일한 지역으로 대부분의 가구가 농업에 종사한다.

주요 농산물은 쌀과 보리를 비롯하여 마늘·참깨 등의 생산량이 많다.

교통은 322번 지방도가 파주시와 백학면을 연결하면서 면의 중앙을 횡단하며, 연천읍 상리가 기점인 324번 지방도가 면 중앙을 종단하여 자작리까지 이어진다. 도로 포장율이 여전히 미미하지만 여러 도로망이 들어서고 있는 추세이다.

문화유적은 고랑포리에 경순왕릉(敬順王陵)과 사현사(四賢祠)라고 불리었던 임강서원(臨江書院)의 터가 남아 있다. 이 일대는 예로부터 고호(皐湖) 8경이라 불릴 정도로 빼어난 경치를 자랑한다.

원당(元堂)·자작(自作)과 주민미거주지역의 판부(板浮)·반정(伴程)·고랑포(高浪浦) 등 5개 리가 있다.

  1. 중면(中面)

군의 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 79.95㎢, 인구 199명(2019년 현재). 면 소재지는 삼곶리이다.

본래 연천군 지역으로 연천읍내의 북쪽이 되므로 북면이라 하여 삼곶·횡산·중산 등 8개 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중면으로 개칭되었다.

1945년 북한 지역에 속했다가 1954년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에 따라 행정권이 수복되었다. 1962년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에 따라 인접한 5개 리가 행정관할권에 포함되어 현 행정구역을 갖추었다.

면 전체가 거의 산지에 가깝고 대부분 휴전선과 인접해 있기 때문에 군 전체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낮다. 임진강변과 그 지류 유역에 약간의 평지가 형성되어 있을 뿐이다. 경지율은 미미한 수준이며 농사도 밭농사가 주종을 이룬다.

입주가 가능한 삼곶리와 횡산리를 제외하고는 출입영농만이 가능한 지역이고, 주요 농산물은 옥수수·콩·참깨 등이다.

교통은 10번 군도가 남부를 종단하고 있으나, 대부분의 도로가 비포장 상태여서 불편하다. 문화유적은 삼곶리에 돌무지무덤, 적거리에는 고려 말 충신인 이양소(李陽昭)의 묘가 있다.

삼곶(三串)·횡산(橫山)과 주민 미거주지역의 중사(中沙)·적거(赤巨)·마거(馬巨)·합수(合水)·적음(笛音)·진곡(辰谷)·어적산(魚積山)·적동산(積洞山)·도연(陶淵) 등 11개 리가 있다.

  1. 청산면(靑山面)

군의 동남단에 위치한 면. 면적 43.69㎢, 인구 4,038명(2019년 현재). 면 소재지는 초성리이다.

본래 양주군 지역으로 청송면이라 하여 백의·궁평·장탄 등 5개 리를 관할하다가 1895년 포천군에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산내면(山內面) 8개 리가 병합되어 청송과 산내의 이름을 따서 청산면이 되었다.

1945년 대부분의 지역이 북한 지역의 관할구역으로 넘어갔다가, 1954년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에 따라 행정권이 수복되었다. 1957년 면소재지가 초성리로 바뀌었다. 1983년 행정구역 개편에 의거해 삼정(三政)·갈월(葛月)·금동(琴洞)·덕둔(德屯) 등 4개 리가 포천군 신북면에 이속되었다.

면 전체가 남쪽의 종현산(種顯山, 589m)을 비롯하여 산지로 둘러싸인 지형으로 북동쪽에 영평천(永平川), 북쪽에 대전천(大田川), 남쪽에 수동천(水洞川)이 면 전체를 감싸 흐르고 있다. 그 주변지역에 취락지가 크게 형성되어 있다.

밭농사가 우세한 지역으로, 주요 농산물은 고구마·감자·콩·마늘 등이다. 특산물로는 잣을 비롯하여 양봉과 인삼재배를 꼽을 수 있는데, 특히 잣은 그 열매가 크고 맛이 독특한 것으로 유명하다. 산업시설로 규석을 생산하는 광산업체가 1개 있다.

교통은 경원선이 초성역을 지나며, 이와 병행하여 3번 국도가 남서쪽을 종단하고 전곡과 문산을 연결하는 37번 국도가 면의 중앙을 횡단한다. 또한 322번 지방도가 면 중앙을 횡단하면서 3·37번 국도와 연결되는 등 정비된 도로망을 갖추고 있다.

문화유적은 궁평리에 낙선군(樂善君)의 묘가 있다. 초성리에는 38도선 경계비와 38도선 돌파기념비가 있다.

초성(哨城)·대전(大田)·장탄(長灘)·궁평(宮坪)·백의(白蟻) 등 5개 리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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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지』(경기도지편찬위원회, 1957)
『경기도명승고적연혁사』(김용기 편, 1955)
『경기도지』(경기도지편찬위원회, 1955∼1957)
『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1917)
연천군(www.iyc21.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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