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6년 3월에 왕비 책봉을 청나라에 주청하기 위하여 우의정 유후조(柳厚祚)를 상사(上使), 서당보(徐堂輔)를 부사로 한 사행(使行:사절단)의 일원이 된 홍순학(洪淳學)이 4월 9일 서울을 출발하여 북경에 갔다가 그 해 8월 23일 서울로 돌아올 때까지 총 133일 동안의 견문을 기록한 것이다. 모두 3,800여 구에 달한다.
낙선재본(樂善齋本)과 국회도서관본이 전하고 있으며, 이 두 대본을 대교(對校)하여 수정한 『연행가』를 신구문화사(新丘文化社)에서 간행하였다.
작자 홍순학은 1857년(철종 8)에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이후 협판교섭통상사무(協辦交涉通商事務)를 지낸 25세의 젊은 선비로 사행에 오를 때 소년공명(少年功名)의 자부심과 기개가 있었다.
서울을 떠나 고양 · 파주 · 임진강(臨津江) · 장단(長湍) · 송도 · 평산(平山) · 곡산(谷山) · 황주 · 평양 · 가산(嘉山) · 정주(定州)를 거쳐 의주까지 국내에서만도 거의 한 달이 걸린 여정이었다.
압록강을 건너면서 비로소 “허박하고 약한 기질 만리행역 걱정일쎄.”라 하며 이측(離側)한 외로움과 가국(家國) 생각에 무거운 나그네의 심회를 말하고 있다.
국내에서 융숭하였던 지공(支供) · 지대(支待)와는 달리, 무인지경 만주 벌판에서의 군막생활(軍幕生活)의 어려움과 봉황성(鳳凰城)에서 만난 호인남녀(胡人男女)의 기괴한 옷차림과 생활, 낯선 이국의 풍물 등을 소상히 관찰하여 그의 특유의 익살로 표현하였다.
청석령(靑石嶺)을 넘으며 효종 임금이 심양에 끌려가[入瀋] 받은 모욕[受辱]을 통분하였던 이야기며, 요동(遼東) 700리에서 뽐낸 사내의 호기가 번뜩인다. 북경의 문루(門樓) · 사우(寺宇) · 고적을 소견하고, 시전(市廛)을 두루 살펴 환희(幻戱) · 요술(妖術)을 참관하고, 인사를 방문하여 인정을 교환하였던 일 등 당시의 정황을 밝혀주고 있다.
“눈깔은 움쑥하고 콧마루는 우뚝하며 머리털은 빨간 것이 곱슬곱슬 양모 같고 키꼴은 팔척장신 의복도 괴이하다. 쓴 것은 무엇인지 우뚝한 전립 같고 입은 것은 어찌하여 두 다리가 팽팽하냐, 계집년들 볼짝시면 더구나 흉괴하다. 퉁퉁하고 커다란 년 살빛은 푸르스름…… 새끼놈들 볼 만하다. 사오륙세 먹은 것이 다팔다팔 빨간 머리 샛노란 둥근 눈깔 원숭이 새끼들과 천연히도 흡사하다.”라고 하였다.
서울에서 북경까지 긴 노정에 따라 고적을 더듬고, 풍속을 살피고, 인정에 접하였던 바를 소상히 기록한 여행기로 김인겸(金仁謙)의 「일동장유가(日東壯遊歌)」와 쌍벽을 이루는 작품이다.
북경 길가에서 만난 초견(初見) 서양인을 익살로 표현한 대목에서 조선 선비의 오기(傲氣)를 볼 수 있다. 7월 18일 회환(回還), 복명하고 집에 돌아오기까지 반년에 걸친 연행중 보고 느낀 것을 담아놓은 작품이다. 혹자는 이 작품을 가사로 보지 않고, 광의의 수필문학에 포함시키는 이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