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기독교장로교 선교부의 한국선교사 맥레(Macrae,D.M., 馬求禮)의 부인 서덜랜드(Sutherland,E.F., 馬義大)가 그 해 4월 여신도 신사라(申士羅)의 집에서 6명의 여아로 학교를 시작하였다. 1910년 1월에 영생여학교로 정식인가를 받았다.
초대 교장에 서덜랜드가 취임하였고, 설립 당시에는 보통과와 고등과의 구별이 없었으나, 1911년부터 고등과가 정식으로 개설되었다. 1913년에 제1회 졸업생 2명이 배출되었으며, 보통과와 고등과의 별도 설치 인가를 받았다.
그 뒤 1915년에 공포된 <개정사립학교령>으로 일제의 기독교계 학교들에 대한 성서교육 철폐 요구 등의 탄압과 선교부 단독 혹은 한국 교회와 공동 운영 여부 등으로 수난을 겪기 시작하였다.
교명 변경 및 성서교육 철폐에 대한 거부로 각종학교로 명맥을 유지하여 왔으며, 그런 중에도 학생수는 계속 증가하여 1921년에 1학년을 갑 · 을 · 병 · 정 4학급으로 편성하였다. 1929년 10월에 고등과가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로 인가되어 고등보통학교 교장에 맥에천(Maceachern,M.E.)이, 보통학교 교장에 럽(Robb,A.F.)이 취임하였다.
1926년에는 기숙사로 사용하던 부락우도기념관(富樂友道記念館)을 증축하여 교실로 사용하였으며, 1930년에 교사를 건축하였다. 1931년에 고등보통학교 제1회 졸업생 38명을 배출하였으며, 1935년에는 교회와 사회 유지 및 학부모 · 동문들의 기부금으로 재단법인을 설립하였다.
1937년부터 일제의 탄압이 더욱 가중되어 교명을 영생여자중학교로 개칭하였다.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가지가지 수난에 직면하였는데, 특히 전국적으로 파급되었던 조선어학회 사건이 영생여학교에서 시작되었다.
즉, 1942년의 조선어학회 사건을 조작하기 위한 전초전으로 함흥학생사건을 꾸며 일본 경찰이 교직원과 학생을 수색하고 검거함으로써 초토가 되다시피 하는 수난을 겪었다.
1931년에는 보통과 학생 400명, 교사 8명, 고등과 학생 303명, 교사 13명에 이르렀으며, 1937년에는 보통과 학생 427명, 교사 7명, 고등과 학생 449명, 교사 17명이 되었다. 이 학교는 1907년에 설립된 영생학교와 함께 북동부지방의 교육 진흥과 민족의식 고취에 공헌한 바 컸으나, 국토 분단과 함께 선교단의 철수로 폐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