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실석난간조배의궤 ()

영조대왕 태실가봉의궤
영조대왕 태실가봉의궤
유교
문헌
조선시대 태실 가봉(胎室加封)의 절차을 기록한 의궤.
이칭
이칭
태실가봉석난간조배의궤(胎室加封石欄干造排儀軌)
정의
조선시대 태실 가봉(胎室加封)의 절차을 기록한 의궤.
개설

태실 가봉은 태실의 주인이 국왕으로 즉위한 이후 기왕에 조성된 태실 주변에 난간석과 표석 등 석물을 새로이 조성하는 의식을 일컫는다. 원래의 태실에 돌로 만든 난간을 세운다는 의미로 ‘태실석난간조배(胎室石欄干造排)’라고 하며, 태실 가봉의 진행 과정과 석물 조성 절차를 기록한 책을 ‘태실석난간조배의궤’라고 한다. 국왕의 생존 시에 태실 가봉이 이루어지면 ‘성상(聖上)’이나 ‘당저(當宁)’라고 적고, 국왕의 사후에 태실 가봉이 이루어지면 ‘○○대왕’이라 하여 사후에 받은 시호를 적었다. 국왕 태실로서의 위용을 갖추기 위해 새로 추가되는 석물은 석난간·개첨석·중동석·상석·전석·귀롱대 등 다양하다. 현전하는 『태실석난간조배의궤』는 모두 5건으로,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4건, 문의문화재단지에 1건이 소장되어 있다.

편찬/발간 경위

태실에 석물을 새로 추가하여 가봉하는 『태실석난간조배의궤』는 왕자녀의 태실을 조성하는 과정을 기록한 『장태등록』의 편찬 방식과 동일하며, 모두 5건이 편찬되었다. 어람 1건, 예조 1건, 관상감 1건, 감영 1건, 본관 1건을 편찬하는데, 필요한 인력과 물건들은 태실을 조성한 지역과 인근 지역에서 조달되었다. 의궤서사교생이 의궤를 필사하는 과정을 마치면, 책장이 의궤를 장식하고, 보자기로 싼 다음 각각 준비한 의궤궤(儀軌櫃)에 넣어 어람용 의궤 1건은 왕에게 바치고, 그 외 4건은 각 기관에서 보관하였다.

서지적 사항

1729년(영조 5) 충청도 청주에 소재한 영조의 태실 석물을 가봉한 『당저태실석난간조배의궤』는 1책 9장이다. 1995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청주시 문의문화재단지에 소장되어 있다. 그 외 4건은 모두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1801년(순조 1) 강원도 영월에 소재한 정조의 태실 석물을 가봉한 『정종대왕석난간조배의궤』(奎13967)는 1책 12장이고, 1806년(순조 6) 충청도 보은 속리산에 소재한 순조의 태실 석물을 가봉한 『태실석난간조배의궤』(奎13968)는 1책 10장이다. 1836년(헌종 13) 경기도 영평에 소재한 익종의 태실 석물을 가봉한 『익종대왕태실가봉석난간조배의궤』(奎13970)는 1책 10장이고, 1847년(헌종 13) 충청도 덕산에 소재한 헌종의 태실 석물을 가봉한 『성상태실가봉석난간조배의궤』(奎13970)는 1책 10장이다.

내용

국왕의 태실을 가봉하는 의식은 처음 조성된 아기 태실[阿只胎室]을 국왕의 체모에 걸맞게 화려하게 석물을 새로이 추가하는 가봉 태실로 조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국왕이 즉위하면 곧 국왕의 태실을 가봉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명종은 이 원칙대로 1546년(명종 즉위년) 5월에 태실을 가봉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즉위 후 수년의 시간이 지나서 태실을 가봉하는 사례가 더 많았다. 그 이유는 태실 가봉은 태실 주변에 석물을 더하는 것이므로 300명 이상의 많은 인원이 동원되어야 하는 큰 역사였기 때문이다. 1801년(순조 1) 10월 강원도 영월에 있던 정조의 태실을 가봉할 때에는 강원도에서 1700명, 충청도에서 2508명의 부역군(赴役軍)과 예석군(曳石軍)이 동원되기도 하였다. 백성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줄이기 위해 농번기나 흉년을 피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재위 7~8년이 지난 이후에 태실을 가봉하게 되었던 것이다.

태실 가봉은 관상감과 선공감에서 주로 담당하였으나, 인력과 필요한 물건들은 대부분 태봉이 위치한 지역과 인근 지역의 협조로 이루어졌다. 태실 가봉은 국왕의 아기 태실 주변에 석난간·개첨석·중동석·상석·전석·귀롱대와 같은 석물을 새로이 조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태실석난간조배의궤』에는 가봉 태실의 조성에 관한 신하들의 건의 과정을 시작으로 태실 가봉 일정, 인력과 물건의 분정 내역, 주요 석물의 연마 과정에 관한 보고, 고유제와 후토제 제사 의식의 절차와 축문, 각종 석물의 길이와 너비 척수, 원역질, 공장질, 난간석 조작도, 난간석 배설도, 진설도 등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18세기 초반부터 19세기 중반까지 국왕의 즉위 이후에 이루어지는 태실 가봉의 실상과 가봉 태실의 석물 조성 과정을 상세히 이해할 수 있다.

참고문헌

『조선 왕실의 안태와 태실 관련 의궤』(국립문화재연구소, 2006)
「조선시대 출산과 왕실의 ‘장태 의례’─문화적 실천 양상과 그 의미」(김지영, 『역사와 세계』 45, 2014)
「조선 왕실의 장태 의식과 관련 의궤」(김호, 『한국학보』 29-2, 2003)
「영조대왕 태실 가봉의궤에 대하여」(차용걸, 『호서문화 연구』 2, 1982)
집필자
김지영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