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전 ()

유교
제도
조선시대 전주에 있던 태조 진전(眞殿).
정의
조선시대 전주에 있던 태조 진전(眞殿).
개설

경기전(慶基殿)은 조선시대 국조인 태조의 어진(초상화)을 봉안하고 제사 지내던 외방 진전 중의 하나이다. 영흥 준원전(濬源殿)과 함께 가장 오랫동안 존속하며 조선 왕조의 뿌리를 재확인하는 기념 장소로 역할하였다.

내용

조선시대에는 국조인 태조의 어진을 모시고 제사 지내는 진전을 서울에는 문소전(文昭殿) 한 곳, 외방에는 전주의 경기전, 영흥의 준원전, 경주의 집경전(集慶殿), 평양의 영숭전(永崇殿), 개성의 목청전(穆淸殿) 등 다섯 곳에 두고 유지하였다. 조선 왕실의 관향인 전주에 있던 태조의 영전에 경기전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1442년(세종 24)의 일이다. 이듬해에는 새로 태조의 어진을 경기전에 봉안하였고 제위전을 두어 제사의 비용으로 쓸 수 있게 하였다.

임진왜란 때 서울의 문소전과 어진을 보관하였던 선원전이 불타고, 외방 진전 중에서도 전주 경기전과 영흥 준원전의 태조 어진만이 보전되었다. 아산으로 옮겨 보전되었던 경기전의 태조 어진은 다시 난이 있을 것에 대비해 강화를 거쳐 묘향산으로 옮겼다가 1614년(광해 6) 경기전을 중건한 후 봉안하였다. 묘향산에서 전주로 영정을 옮길 때 왕이 모화관으로 나가 맞이한 후 전작례를 올렸고, 승지와 중사가 한강까지 나가 전별하였다. 경기전 태조 어진은 병자호란 때에 적상산성으로 옮겨졌고, 난 후에 다시 전주에 안치되었다.

이후 서울의 태조 진전은 복구되지 못한 채로 있었다. 1677년(숙종 3) 남별전을 3실로 중건하였고, 1688년(숙종 14)에 전주 경기전의 태조 어진을 서울로 가져와 모사한 후 남별전의 남은 칸에 봉안하였다. 이모를 마친 후 경기전의 어진은 다시 신련(神輦)에 실어 환봉하였고, 태조 어진을 실었던 신련은 경기전에 그대로 보관하였다. 1764년(영조 40) 태조 어진의 뒷면에 손상된 곳이 많아 서명응(徐命膺)을 보내 배접하게 하였다. 1767년(영조 43) 전주성에 화재가 나 경기전 어진을 향교로 옮겼다가 다시 봉안하였다. 1771년(영조 47)에는 경기전 옆에 전주 이씨 시조묘를 세우고 ‘조경묘(肇慶廟)’라 하였다. 1872년(고종 9) 경기전에 봉안한 어진이 세월이 오래되어 희미해지자 서울로 옮겨 이모한 후 새 어진을 경기전에 봉안하고 옛 어진은 세초한 후 매안하였다. 1894년 동학군이 전주부를 습격하자 경기전 어진을 위봉산성 행궁으로 옮겼다가 다시 환안하였다.

대한제국 시기에는 경기전 의장과 기물들을 천자의 의식대로 고쳐 배열하였다. 1907년 제향 장소를 일제히 정리하는 칙령이 반포되었는데 영희전과 장녕전, 화령전, 육상궁, 경우궁, 선희궁 평락전 등에 봉안된 어진을 창덕궁 내 선원전으로 옮기도록 한 내용이었다. 경기전은 영흥의 준원전과 함께 그대로 유지되었다. 조선 말기까지 서울의 진전과 봉안각에 남아 있던 역대 왕들의 어진이 한국전쟁기에 대부분 소실되었으나, 1872년 마지막으로 옮겨 그려진 경기전의 태조 어진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의의와 평가

경기전은 조선시대 국조인 태조의 어진을 봉안하고 제사 지내던 외방 진전 중의 하나이다. 영흥 준원전과 함께 가장 오랫동안 존속하며 조선 왕조의 뿌리를 재확인하는 기념 장소로 역할하였다. 경기전의 역사와 제향 의례를 통해 조선시대 태조 어진이라는 왕조의 중요한 상징물에 대한 국가적 기념 방식을 살펴볼 수 있다. 경기전에 봉안된 태조 어진은 두 차례의 큰 전란 중에도 훼손되지 않고 보전되어, 이를 바탕으로 국초의 모습 그대로 태조 어진을 다시 그리고 전할 수 있었다.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일성록(日省錄)』
『춘관통고(春官通考)』
『영정모사도감의궤(影幀模寫都監儀軌)』
「19세기 진전 및 어진 봉안처 운영에 대한 연구」(김지영, 『장서각』 26, 2011)
「숙종·영조대 어진 도사와 봉안 처소 확대에 대한 고찰」(김지영, 『규장각』 27, 2004)
「조선왕조시대에 있어서의 진전의 발달」 (조선미, 『고고미술』 165, 1980)
집필자
김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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