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국가민속문화재(현, 국가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넓은 대지에 연당이 있는 이 집은 1756년(영조 32)에 지었다고 전한다. 일심당(一心堂)은 그 때 붙여진 정침의 당호라고 한다.
안채와 사랑채 · 곳간채 등이 직각으로 결합하여 □자집을 구성하였고 서남향으로 앉혀져 있다. 개울 옆의 연정(蓮亭)은 별당으로서 사랑채 마당가에 뚝 떨어져 남향으로 앉혀져 있다. 안채는 안방이 2칸이고 대청이 4칸인데 안방의 뒤쪽에는 골방과 툇마루가 있고, 안방의 아래는 3칸 크기의 큰 부엌이 있다.
안방 아래로 부엌이 가로 길게 굽어나가는 ㄱ자집 형식은 영남지역의 대가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구조이다. 또 부엌 끝으로는 3칸의 긴 광채가 이어져 있다. 2칸의 안방은 가운데에 장지를 두어 아랫방 · 윗방으로 구분해 쓸 수 있게 되어 있다.
대청의 건너편에는 한 칸이 좀 넘는 크기의 건넌방이 있는데 이 집에서는 작은방이라 부른다. 이 작은방 아래에서 직각으로 꺾어 붙인 외양간과 방앗간, 광을 가진 아래채가 부엌밑 광채와 마주하였으며 방앗간에는 디딜방아가 설치되어 있다.
사랑채는 一자집이며 사랑방 · 대청 · 대문 · 광 · 작은사랑 · 마루방 등으로 이루어졌다. 사랑방은 한 칸의 온돌이며 전퇴를 제외한 대청에는 3면에 분합을 달아서 사랑방의 협소함을 보완하였다.
대청의 전퇴 마루 끝에는 긴 평난간이 갖추어져 검소한 가운데 운치를 더하고 있다. 외양간과 여러 광채의 벽은 판재(板材)로 탄탄히 꾸민 판벽이다. 사랑채 단하 마당 끝에는 대략 3칸 크기의 마판이 있었으나 철거된 지 오래다.
연정은 마당 밖을 굽어 흐르는 작은 계변에 있는데 건너편 급준한 언덕 위에 오래된 소나무와 잡목들이 들어차 있으며 맑은 물이 끊이지 않고 조용히 소리 내어 흐르므로 깊은 산골과 같은 정취를 돋운다.
계류는 부정형으로 크게 넓혀서 연못을 만들었는데 인공의 티가 거의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자연스럽다. 정자는 3칸의 온돌방과 5칸 크기의 대청으로 구성되어 있고, 연못가 동변에는 네 개의 퇴기둥을 내세워서 기와지붕을 덧달아 내었다.
이것은 차양으로 처마를 깊게 드려서 일조와 더위를 차단하고자 한 것이다. 몸채와 정자의 합리적인 구성과 작은 계류를 막은 연못의 존재는 주인의 자연애와 운치스러운 생활관, 인생의 지혜를 잘 나타내준다. 이 집은 조선시대 향원(鄕園)유적으로서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