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으로, 겹처마에 팔작지붕이다. 본래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문단리에 있었으며 관청의 손님을 보내고 맞이하던 건물이었다.
1467년(세조 13)에 군수 정종소(鄭從韶)가 사신을 마중하고 배웅하기 위할 목적으로 건립하였으며 처음에는 남정자(南亭子)로 불리웠다. 이후 중간에 폐지되었다가 1643년(인조 21년) 신숙(申淑)이 다시 세우고 이황이 쓴 ‘영훈정’이라는 편액을 새겨서 걸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 1910년 현재의 위치인 영주 시청 안으로 옮겼는데 시의회사무실 서쪽의 영주초등학교 담장과 인접한 곳에 남향을 하고 있다.
건물의 평면구성은 3칸 통칸으로 사방이 개방되어 있고 마루의 바닥은 우물청판을 깔았다. 마루 끝 가장자리는 난간을 둘렀고 우측면 뒷칸에 중층에 오를 수 있는 가파른 사다리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중층의 하부 기둥은 덤벙주초 위에 12주(柱)의 원주(圓柱)를 3열로 배치하여 납도리로 결구(結構)하였고, 상부는 가운데 기둥 없이 10주의 원주를 세워 납도리로 결구하였다. 상부 목구조부의 결구 수법은 이익공(二翼工)으로 익공(翼工)의 뿌리 쇠서 형상이 소박하면서도 힘찬 느낌을 주지만 한편으로는 중기 말경과 후기에 이르러 나타나는 초익공(初翼工) 상면의 이익공 위에 운공(雲工)을 더하여 오히려 중기 이후의 형상 색채가 짙다. 외부에 1출목(出目)을 두어 행공첨차를 두고 외목도리를 받게 하였으며 외목도리 하면에 장혀를 끼워넣어 높이를 맞추는 수법을 쓴 것이 특이하다. 내부는 출목이 없고 보아지를 만들어서 보를 받도록 하였다. 상부가구는 5량가(樑架)로 꾸몄으며 대량(大樑) 위 중도리(中道里) 외측에 우미량을 사용하였고 천장은 서까래를 노출시키고 산자널에는 치받이흙으로 발라 마감한 연등 천장으로 꾸몄으며 비교적 건실한 목재를 사용하여 당시의 투박한 치목수법이 돋보인다.
조선 후기 보편화되었던 각 가문의 정자와는 달리 관청용으로 사용하고자 건립하였던 점이 특이하다. 비록 건물이 일제강점기 이후 관청의 사무실로 사용하기 위하여 칸막이를 한 흔적들로 가구(架構)의 결구가 다소 이완되고 일부 퇴락(頹落)되긴 하였지만 비교적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당시의 건축양식을 이해하고 건축 수법을 연구함에 좋은 자료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