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충사는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무렵 여수지방의 명문이었던 정씨(丁氏) 문중에서 정철(丁哲)·정춘(丁春)·정대수(丁大水)·정린(丁麟) 등 네 사람이 이순신(李舜臣)의 휘하 수군으로 종군하여 큰 공을 세운 것을 기려 세운 것이다.
『충무공전서(忠武公全書)』 을미 5월 27일에 “정철이 서울에서 진으로 서신을 가지고 와 ……” 등의 기록이 나오고 이순신의 총애를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정철은 원래는 문과에 급제한 문신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수문장으로 사촌동생 정춘(丁春)과 함께 이순신의 막하에 들어가 진주 제석당산성(帝釋堂山城)에 주둔하여 큰 공을 세웠으므로 이순신의 계문으로 초계군수가 내려졌다.
그 뒤 아우 정인, 아들 정언신(丁彦信)과 함께 순절하여 정철에게는 병조판서가 추증되었다. 1921년에 창원정씨(昌原丁氏) 문중과 여수지역 향민이 쌍봉면 웅천리(지금의 여수시 웅천동)에 오충사를 재건하였는데, 이 때 이순신을 주벽으로 모시게 되고 정씨 네 사람을 배향하면서 오충사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웅천은 곰천·고음천(古音川)이라고도 불리었고, 이 마을에 속하는 솔개마을에 정철의 집이 있었으므로 이순신은 어머니 변씨를 이곳으로 모시게 하여 피난처로 삼았다. 변씨부인은 이곳에서 만 5년간 피난살이를 하였으며, 지금도 그 집터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