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행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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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의 생성 · 변화 · 소멸을 목 · 화 · 토 · 금 · 수라는 오행의 변전으로 설명하려는 역이론(易理論). 유학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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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만물의 생성 · 변화 · 소멸을 목 · 화 · 토 · 금 · 수라는 오행의 변전으로 설명하려는 역이론(易理論). 유학이론.
내용

오행론은 음양설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기 때문에 일찍부터 음양오행설로 불리고 있다. 동양의 참위설(讖緯說)도 음양오행론을 바탕으로 설명되고 있다.

(1) 음양설

영혼과 물질의 기원을 분명히 구별하는 단계에 이르렀을 때 중국 고대인들에게 두드러지게 생겨난 것이 음양설인데, 그것은 일종의 자연철학이며 세계관이었다.

중국 고대인의 사고 방식에 따르면, 우주의 만물은 모두 형(形)·질(質)·기(氣)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기는 감각을 초월하는 존재로서 생명의 본원, 우주의 근본적인 활력이다. 기는 태일(太一)에서 생겨나 발전해 음과 양의 이원(二元)으로 갈라지게 된다. 따라서 우주의 만물이나 모든 현상, 예컨대 남녀·좌우·천지·명암 등과 같은 것들은 모두 음양의 이원으로 형성되었다고 생각되었다.

음양의 이원을 비교할 경우에는 음보다는 양이 상위에 있다고 생각되었다. 음양의 이원은 만물과 모든 현상의 생성·변화·소멸 등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으면서도 그 작용은 일정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생성·변화 등을 예측하는 것은 어렵다.

그렇지만 음양의 이원은 상대적임과 동시에 순환적이고 포함적이다. 즉, 그 이원이 병존하는 경우에는 상화(相和)하여 생성에 관계하고 있지만, 반대로 상반(相反)·상쟁(相爭)하는 경우에는 사멸(死滅)에 이르게 된다. 또, 양인 봄과 여름에 이어 음인 가을과 겨울이 오고 있는 것처럼 양자는 교대, 순환해 변화에 이르고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양이 극에 이르면 그 찰나에 음이 생겨나는데 여름 한가운데에 이미 가을의 기운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 또, 음이 극에 이르면 그 찰나에 양이 생겨나는데 겨울 한가운데서 봄의 기운이 이미 나타나는 것과 같다. 이것이 천지 자연의 대원칙이다. 이러한 음양설이 오행설과 결부되어 음양오행설이라 불리면서 여러 사상이나 종교뿐만 아니라 넓게 동양인의 사고 방식에 큰 영향을 주었다.

(2) 오행설

음양설을 바탕으로 성립된 오행설은 음양설과 마찬가지로 중국 자연 철학의 일종이며 세계관이었다.

오행이란 목(木)·화(火)·토(土)·금(金)·수(水)의 다섯 원소를 말한다. 이 다섯 원소가 우주 사이를 유행, 변전해 만물을 생성한다는 것이 초기의 오행설이었다. 특히, 이 다섯 원소가 선발된 것은 그것들이 인간의 일상 생활에서 결코 없어서는 안 되는 다섯 가지 요소이기 때문이다.

오행설은 그 뒤 많은 방면에 응용되고 종교적인 예언에 이용되기도 하였다. 서기전 3세기경 전국 시대에는 오행설에 음양설을 결부시켜 여러 가지 현상을 설명하는 이론적 틀이 되기도 하였다.

음양오행 사상은 처음 제(齊)나라 추연(鄒衍)에 의해 체계적으로 성립되었다. 이른바 오덕종시설(五德終始說)이 그것이다. 그는 종래부터 전해 내려오던 오행설을 종합, 정리해 우주 사이의 모든 변화는 오행의 덕성(德性), 즉 그 운행에 의한 것이라며, 이른바 오행상승설(五行相勝說)을 제기하였다.

그에 의하면 오행의 상호 관계는 “목(木)은 토(土)를 이기고, 금(金)은 목을 이기고, 화(火)는 금을 이기고, 수(水)는 화를 이기고, 토는 수를 이긴다.”고 하는 순환, 즉 상승(相勝)의 원칙이다. 이 원칙은 사계절의 추이(推移)나 방위로부터 왕조의 흥망 등 모든 현상의 변화에 적용된다고 하였다.

가령 하왕조(夏王朝)는 목덕(木德)이지만 하왕조를 대신해 일어난 은왕조(殷王朝)는 금덕(金德)이며, 그 은왕조를 대신해 일어난 주왕조(周王朝)는 화덕(火德)이라고 한다. 이 설은 전국시대 말엽부터 시작, 한나라 초엽에는 화북 지방에 널리 퍼져 있었다.

한나라의 기초가 확립되면서 새롭게 오행상생설(五行相生說)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는 목은 화를 낳고, 화는 토를 낳고, 토는 금을 낳고, 금은 수를 낳고, 수는 목을 낳는다고 하여 상승설처럼 왕조의 교대·순서는 물론 그 밖의 현상들을 설명하였다.

(3) 오행설의 발전

한나라 때 발전한 오행설은 선진시대(先秦時代)와 비교해 내용이 더욱 풍부해지는데, 계절·방위·색(色)·맛·음(音)에 이르기까지 오행을 배당하게 되었다.

음양오행은 원래 우주의 본체가 인간에게 부여해 준 영향에 대해 설명한 것이었다. 그러나 한나라 때에는 반대로 인간이 질서 있는 생활을 하는가의 여부에 따라 우주나 자연의 운행에 영향을 준다는 설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천인감응(天人感應)의 설이 완성되고 재이(災異)에 대한 예언을 하며, 정치나 도덕뿐만 아니라 점성(占星)·율력(律曆)·의술(醫術)·점(占)에 이르기까지 큰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경향에 박차를 가한 것이 참위설이다.

참(讖)이란 은어(隱語)를 써서 길흉을 예정(豫定)하는 것으로서 일종의 예언을 말한다. 위(緯)는 경(經), 즉 세로에 대해 가로줄로 경서(經書)의 해설을 의미한다. 본래 양자는 구별되었던 것이지만 그냥 합쳐서 참위설이라 부르게 되었다. 후한 시대의 장형(張衡)은 이러한 설이 서기 전후에 성립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왕망(王莽)이나 후한의 광무제(光武帝)가 여기에 심취했기 때문에 후한시대에 특히 유행하였고, 이를 통해 경서를 해석하였기 때문에 후한시대에는 신비화하는 경향마저 있게 되었다. 위서(緯書)에는 점성(占星)이나 재이상서(災異祥瑞)의 사상이 많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음양오행설과 결부되기가 용이하였을 것이다. 그 결과 음양오행설의 내용은 차츰 복잡해져 가는데, 우리 나라에 들어온 것은 이미 이러한 복잡화 과정을 거친 것이었다.

(4) 한국에의 전래와 수용

우리 나라에 음양오행 사상이 들어온 것은 한족(漢族)과의 접촉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한사군시대에 이미 음양오행의 사상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음양오행 사상의 구체적인 이해는 삼국시대에 들어와서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

우선 고구려나 백제 고분의 사신 벽화를 들 수 있다. 평안남도 용강군 매산리·신덕리 및 진지동에 있는 고구려 고분 등에는 사신 벽화가 그려져 있어서 당시에 음양오행설이 어떻게 이해되고 있었는지를 알게 해 준다.

고구려 벽화는 쌍영총(雙楹塚)이라고도 불린다. 고분 내부는 고구려시대의 발달된 예술의 한 정수를 볼 수 있게 하는 외에도 사신 벽화(四神圖)에 오행의 네 방위를 맡은 신, 즉 청룡(靑龍)·백호(白虎)·주작(朱雀)·현무(玄武)가 그려져 있다. 사신도는 중앙에 있는 망자(亡者)를 둘러싸고 있는 네 방위의 수호신으로 망자의 영혼이 영원불변할 것을 기원하는 뜻으로 그려진 것이다.

또, 고구려 광개토대왕 비문에도 음을 상징하는 귀(龜)와 양을 상징하는 용(龍)이 나타나고 있으며, 정치 체제에서 오부오방제(五部五方制)로 나눈 것도 오행설의 영향으로 보인다. 문무양반(文武兩班)으로 나누는 것이나, 도시를 설계하는 데 있어서 중앙에 정부 청사를 두고 사대문을 설치한 것도 음양오행설의 영향으로 보인다.

백제에도 오경박사(五經博士)와 아울러 역학사(易學士)·역박사(曆博士) 등이 있었다. 무왕 3년에 삼론종(三論宗)의 승려인 관륵(觀勒)이 역본(曆本)과 천문 지리서 등을 갖고 일본에 갔다는 기록도 있다. 이로 미루어 당시 백제에는 음양오행설에 관한 서적들이 유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음양오행설을 가장 늦게 받아들인 신라에서도 그것은 이루 열거할 수 없을 만큼 그 영향이 지배적이었다. 이는 태종무열왕 비의 귀부(龜趺)에다 비신(碑身)을 세운 모습이라든지, 신문왕 2년(682)에 세운 감은사 지석(感恩寺址石)에 보이는 태극 도형, 그리고 ≪삼국유사≫의 설화 가운데 음양오행설을 주제로 한 것이 많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예컨대, 만파식적(萬波息笛)의 설화나 선덕왕지기삼사조(善德王知幾三事條)에 나타나는 내용이 대표적이다. 선덕왕은 영묘사(靈廟寺)의 옥문지(玉門池)에 개구리가 모여 우는 것을 보고 백제 병의 내습을 예견하는 글 가운데서 “옥문은 여근(女根)인데 여자는 음이며, 그 색은 백색이요 백색은 서방이다(玉門者女根也 女爲陰也 其色白 白西方也).”라며, 자신의 예견을 음양오행설로써 설명하고 있다.

통일신라 이후에는 성당(盛唐) 문화의 수입으로 말미암아 전문 지식 계급에 의한 음양오행설의 이해도 더욱 깊어져서 외교 문서의 제작, 시간 관측과 역서(曆書)의 제작, 의학·법률 등 광범위한 영역에 미쳤다.

고려시대에 오면 동경(銅鏡)이나 석등(石燈)에 쌍룡 태극형의 문양이 보인다. 조선시대의 두드러진 사례로는 훈민정음의 구조 원리가 음양오행의 역리(易理)를 바탕으로 하였고, 이제마(李濟馬)의 ≪동의수세보원 東醫壽世保元≫처럼 역리를 의학 방면에 응용하기도 한다.

음양오행 이처럼 사상은 한민족의 신앙과 예술은 물론, 정치 제도와 관제(官制) 등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방면에 걸쳐 활용되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강서고분벽화(江西古墳壁畵)의 연구」(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고려시대의 오행적(五行的) 역사관」(최병헌, 『한국학보』 13, 1978. 겨울호)
「고려시대 오행설(五行說)에 대한 연구」(이희덕, 『역사학보』 79, 1978)
「한국역학사상(韓國易學思想)의 특질과 그 문화적 영향」(류승국, 『동양철학연구』, 근역서재,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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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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