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진의 아들 노염(盧焰) 등이 간행한 초간본이 병화로 유실되자, 1632년(인조 10) 손자 노척(盧脊)이 증보하여 중간하였다. 권두에 정온(鄭蘊)의 서문이 있고 발문은 없다.
7권 4책. 목판본. 규장각 도서·국립중앙도서관·고려대학교 도서관 등에 있다.
권수에 세계(世系)·연보가 있다. 권1에 시·부·표·전(箋)·조(詔), 권2에 제문, 권3에 행장·묘비지, 권4에 소·계·장(狀)·서(書), 권5에 잡저·주(奏)·논·기·서(序), 권6·7에 외집(外集)으로 행장·시장(諡狀)·묘지명·신도비명·사제문(賜祭文)·제문·상향제문(常享祭文)·만사 등이 수록되어 있다.
소의 「사관논복양종소(四館論復兩宗疏)」는 불교를 공박하는 것이다. 그는 불교는 청정과욕(淸淨寡慾)하고 이진절상(離塵絶想)하여 산중에 들어가서 괴로움을 참고 수행하므로 사물(事物)의 침해를 받지 않는 것이라 보았다. 즉, 불교가 성하면 유교가 쇠하고 유교가 성하면 불교가 쇠하는 상대적인 존재라고 이해하여, 궁중에서 기복(祈福)하는 일까지 논핵하려는 것이다.
잡저 중 「중간양정편발(重刊養正編跋)」은 효제(孝悌)와 효순(孝順)에 관한 책인 『양정편(養正編)』을 향리의 자제들에게 보급시키기 위해 쓴 글이다. 「서존요집후(書尊堯集後)」는 진관(陳瓘)이 지은 『존요집』의 독후감이다. 진관은 당시 국사(國史)를 간쟁하다가 귀양가서 이 책을 썼는데, 왕안석(王安石)의 정책을 비판한 것이라고 한다.
「균전의(均田議)」는 그의 경제 사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그는 당시 가장 큰 병폐는 빈부의 격차와 토지겸병(土地兼倂)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빈부의 차가 심하고 교양(敎養)에 법이 없으면 정치를 잘하지 못한 것이라는 장자(張子)의 말을 인용하고, 이를 해결하는 방법은 균전제(均田制)를 시행하는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이는 당시에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하나인 토지 집중과 빈부 격차의 심각성을 폭로하고, 이를 해결하려는 의도로 건의한 것이다. 저자의 정치사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조정설(調停說)」에서는 송나라 원우연간(元祐年間)에 군현(群賢)이 각지에 흩어져 있고 사설(邪說)이 다투어 일어나자 여대방(呂大防)·유지(劉摯) 두 사람이 내놓은, 군자와 소인을 병용하자는 조정설을 매우 못마땅하게 다루고 있다. 그는 군자와 소인은 빙탄(氷炭)과 같아서 도저히 서로 용납될 수 없는 것이라며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사병무양의론(死病無良醫論)」은 죽을병에 좋은 의원이 없다는 것은, 국난에 훌륭한 재상이 있어도 소용이 없다는 것과 같은 논리이므로, 충신은 혈성(血誠)을 다 바쳐 이를 구제해야 한다는 논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