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리 해역은 동경 126°57′27″, 북위 34°24′40″에 위치하는 곳이다. 완도읍에서 동북방 8.7㎞에 위치한 조약도(助藥島)의 동쪽 끝에 있는 어두리 마을 앞 300m 해상의 무인도인 어두지섬의 동북 돌출부분에서 72m 지점에 위치한다.
발굴조사된 경위는, 1983년 12월 8일여수시 국동에 거주하는 김용렬(金勇烈) 등이 키조개 채취작업 중 인양한 청자 4점을 순천의 검찰지청에 신고하면서부터이다. 이를 신고 받은 김인식(金仁植) 검사의 확인작업으로 12월 13일완도군과 고흥군의 문화공보실 관계자 입회 하에 현장확인조사를 실시하였다. 그리하여 이 해역에 청자류가 다량 매장되어 있음을 확인하고 문화공보부에 보고하자, 문화재관리국(현, 국가유산청)이 완도 어두리 해저유물 발굴조사단을 구성해 발굴에 착수하였다.
1983년 12월 19일부터 12월 30일까지의 1차와 1984년 3월 15일부터 5월 23일까지의 2차에 걸쳐 해저에 매장된 도자기를 비롯한 침몰선체를 인양, 조사하였다. 1차 조사 때는 해당구역에 대한 해저면상태와 유물매장량확인 및 발굴조사의 구체적인 방법을 연구하여 유물이 집중되어 있는 곳은 약 50∼60m의 융기된 구릉으로 넓이는 대략 10m의 원형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유물인양은 잠수부가 2인 1개조로 잠수하여 지정된 구간에서 유물을 찾아 광주리에 담으면, 조사선에서 광주리를 끌어올리는 작업이었다. 인양된 유물은 고려시대의 목선(완도선) 1척과 약간의 수저 및 그릇 등의 금속제품, 숫돌 · 목제품 및 3만 645 점의 도자기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출토된 도자기의 대부분은 청자였으며, 흑갈유(黑褐釉)의 도기 26점과 회흑색구토기대호(灰黑色口土器大壺) 1점, 토제시루 1점이 파손된 채로 인양되었다.
청자는 15점에 달하는 철회(鐵繪)의 매병(梅甁)과 장고를 제외하면 거의 모두가 무늬없는 청자들로서 색깔은 암록색이나 녹갈색을 띠었다. 특히 흑갈색을 띠는 청자는 철분의 함유량이 많은 경우 나타나는 것인데, 이 중에는 오랫동안 바닷물에 침식되어 유약의 색이 변화된 것도 많았다. 겉면는 모래 등의 잡물이 많이 섞여 있어 조잡하였으며, 기벽(器壁)은 대체로 얇으며 탁한 소리를 냈다.
기형별로는 대부분 대접 · 접시 · 완(盌) 등이 대부분을 차지하였고, 광구병(廣口甁) · 유병(油甁) · 호(壺) · 발(鉢) · 잔(盞) 등이 일부분을 이루고 있었다. 이들은 잡물이 섞인 조잡한 태토(胎土)로 만들어졌으며, 대부분 점토가 섞인 내화토(耐火土)를 4, 5개소에 얇게 포개어 구운 것들이었다.
도자기들은 조사결과 해남군 산이면 진산리 일대의 요지군(窯址群)에서 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제작시기는 고려 도자사에서 새로운 전환기인 11세기 후반 경으로 추정된다. 대체로 청자대접 · 접시 등의 생활용 도자기들이다.
강진과 부안에서 생산된 청자가 개성을 중심으로 하는 왕실 · 관청용인데 비해, 해남산의 완도해저출토 도자기들은 제주도를 포함하는 전라남도와 경상남도의 지방관청 및 토호 · 사찰 등의 수요를 충당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진산리 일대의 자기소민들이 만든 도자기를 실은 선박이 경상남도 진주 · 김해와 경상북도 경주, 전라남도 순천 · 장흥 · 고흥 등의 남해안과 제주 등지에 공급하기 위해 항해하다가 이곳에서 좌초해 침몰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곳에서 출토된 도자기들은 국내제품이라는 점, 파손된 것을 합해 3만 점이 넘는 막대한 양이라는 점, 청자 · 흑갈유도기 · 토기 등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 대접 · 접시로 대표되는 당시의 생활용 도자기였다는 사실은 매우 주목된다.
완도해저 발굴의 성과는 무엇보다도 자료의 부족으로 연구가 부진했던 '우리배(韓船)'의 역사와 그 발달과정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학술자료를 제공하였다. 또한 도자기들은 11세기 후반경의 도자기의 양상과 제반 특징, 도자의 수요와 공급과정, 도자의 용도와 수요층에 대한 폭넓은 이해에 도움을 주는 자료로 한국도자사 연구에 있어 큰 디딤돌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