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시 ()

용인군지도읍지
용인군지도읍지
인문지리
지명/행정지명ˑ마을
경기도 남부 중앙에 위치한 시.
정의
경기도 남부 중앙에 위치한 시.
개관

동쪽은 광주시·이천시, 서쪽에는 의왕시·수원시·화성시·평택시, 남쪽은 안성시, 북쪽은 성남시·광주시와 접하고 있다. 동경 127°01′∼127°26′, 북위 37°05′∼37°22′에 위치한다. 면적은 591.33㎢이고, 인구는 97만 5746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3개 구, 1개 읍, 6개 면, 24개 행정동(35개 법정동), 309개 행정리(72개 법정리)가 있다. 시청은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삼가동에 있다.

자연환경

동북부에 광주산맥이, 동남부에는 차령산맥이 지나고 있다. 동북부와 동남부에는 400∼500m의 산지가 솟아 있고 서남부지역에는 낮은 구릉과 평야가 펼쳐져 있다.

동쪽 광주시와의 경계에는 노고봉(老姑峰, 574m)·정광산(503m)·태화산(泰華山, 630m)이 솟아 있고, 이천시의 경계에는 건지산(乾芝山, 411m)·수정산(水晶山, 344m)이 솟아 있다.

서쪽의 의왕시와 수원시의 경계에는 바라산(428m)·백운산(白雲山, 507m)·광교산(光敎山, 582m)·형제봉(兄弟峰, 448m) 등 400m 이상의 산들이 있고, 그 동쪽에는 남한산성에서 뻗어나온 법화산(法華山, 385m)·성산(城山, 472m)·부아산(負兒山, 403m)·함봉산(咸峰山, 306m)이 길게 이어지고 있다. 남쪽에는 사궁산(515m)·쌍령산(雙嶺山, 502m)·경수산(326m)·구봉산(465m)등이 안성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서쪽의 탄천(灘川)과 신갈천(新葛川)은 신갈저수지를 만들고 중앙의 금학천(金鶴川)·경안천(京安川)·진위천(振威川)을 따라 남북방향으로 저지대가 형성되고 있다. 시의 동남부에는 남한강으로 흘러드는 청미천(淸美川)이 동남쪽으로 흐른다.

지질은 전 지역에 선캄브리아기의 호상편마암과 화강암질편마암이 분포하고 서단에는 대보화강암이, 구성면에는 각섬석이 나타난다. 토양은 적황색토와 암설토가 나타난다.

연평균기온은 10.3℃ 내외, 1월 평균기온 -4.8℃, 8월 평균기온 26℃로 한서차가 30℃가 넘는다. 연강수량은 1,300㎜내외이다.

역사

수렵과 농경이 동시에 가능한 하천을 낀 산간지역이 발달하여 비교적 많은 선사유물이 발굴되고 있다. 부아산과 석성산을 축으로 하여 방사상으로 뻗어나간 경안천·탄천·오산천·진위천 등 4개의 수계권역에서 석기류와 반월형 긁개 등 전기 석기시대 또는 그 이전의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또 이 지방에는 북방식 고인돌과 남방식 고인돌이 있고 선돌 또한 간헐적으로 발견된 것으로 보아, 신석기시대에 이미 이 지방에 많은 수의 원시인들이 유입하여 주거지가 형성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모현면 초부리에서 출토된 거푸집[鎔范]으로 미루어 이곳은 이미 서기전 3∼1세기 전에 청동기를 제작하여 사용하거나 다른 지방에 보급할 수 있을 만큼 높은 문화수준을 향유한 강력한 집단이 거주했음을 실증해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청동기시대 1,000여 년간 한반도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보이고 있다.

삼한시대 마한의 자리모로국(咨離牟盧國)과 모수국(牟水國) 사이로 비정(比定)되며 온조왕의 위례성(慰禮城) 도읍설에 따라 처음에는 백제국(伯濟國)의 속방(屬坊)으로 있다가 뒤에 백제(百濟)의 영토가 되었다.

이때까지도 독립된 행정구역을 가지지 못했다가 475년에 고구려장수왕이 남정하여 백제 왕도(王都) 한성(漢城 : 지금의 廣州)을 점령한 뒤, 그 속방인 용인을 구성현(駒城縣)으로 명명하고 고구려 영토에 예속시킴으로써 비로소 현치가 시작되었다.

551년 백제는 신라의 진흥왕과 공동으로 북벌을 실시하여 실지(失地)였던 용인을 수복했으나 553년(진흥왕 14) 신라는 백제가 수복한 한강유역을 탈취하고 한성을 중심으로 신주(新州)를 설치함으로써 용인은 다시 신라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석성(石城)·할미산성(豁未山城)·처인성(處仁城)·행군이토성 등은 이때를 전후하여 축성되었다. 삼국이 통일되었을 때 용인은 한주(漢州)의 속현이 되었고 현의 명칭이 거서(巨黍)로 고쳐졌다.

고려 태조가 즉위한 뒤 940년 거서현을 용구현(龍駒縣)으로 고치고 광주목(廣州牧)의 임내에 두었다. 1172년(명종 2)에 광주목에서 분리되어 감무(監務)가 설치되고 현령으로 보직케 하였다. 1232년(고종 19) 몽골의 제2차 침입 때 적 3만 대군이 아곡리의 처인성에 이르렀을 때 승장 김윤후(金允侯)가 적장 사르타이[撒禮塔]를 사살하여 크게 물리쳤다.

기타 문화유적으로는 10세기를 전후하여 수축된 고려백자 요지(窯址)가 서리 중덕마을에 있다. 『인천안목(仁天眼目)』·『불조삼경(佛祖三經)』·『불설예수시왕경(佛說豫修十王經)』 등 10여 종의 목판본을 내었던 신봉리의 서봉사장판(瑞峰寺藏板)은 특출했던 고려 인쇄문화의 일단으로 전해오고 있다.

조선 초인 1413년(태종 17) 용구현과 처인현(處仁縣)이 합쳐져 용인현이라 하였다. 용인현은 수원진관(水原鎭管) 소속으로 관직은 현령, 종5품으로 보하였다. 1400년(정종 2)에 용인향교가 건립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조선 초기 호수는 457호, 인구는 1,168인이었다.

1576년(선조 9) 이계(李棨)·이지(李贄) 등이 충렬사(忠烈祠)를 건립하고 정몽주(鄭夢周)의 신위를 배향하였다. 임진왜란 때 전라순찰사 이광(李洸)이 이끄는 근왕병 3만이 광교산에서 패했으나, 의병장 김충수(金忠守)의 청룡산(靑龍山)싸움과 원연(元埏)의 햇골싸움으로 적세를 크게 꺾었다.

병자호란 때 충청감사 정세규(鄭世䂓)는 용인의 험천(지금의 수지읍 동천리)에서 패했는데, 이 싸움에서 공주영장 최진립(崔震立)이 장렬하게 순사하였고, 용인인 이찬조(李讚祖) 등이 창의(倡義)하여 순절하였다.

이듬해인 1637년 1월 전라병사 김준룡(金俊龍)이 광교산에 진병하여 방진(方陣)을 쌓고 적을 크게 무찔렀다. 1650년(효종 1)에 심곡서원(深谷書院)이 건립되고 기묘명현 조광조(趙光祖)의 신위가 배향되었다.

갑오개혁 이후 전국 행정구역 개편 때 용인군이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충청도의 양지군(陽智郡) 전역과 죽산군의 근일면(近一面)·근이면·근삼면·원일면(遠一面)·원삼면이 용인군으로 편입되었다. 이때 용인군은 12개 면으로 확정되었고 호수는 6,462호, 인구는 2만 7635인이었다.

근대인물로서 열사 이한응(李漢應)을 비롯하여 독립지사 김혁(金赫)·맹철호(孟哲鎬)·여준(呂準)과 언론인 유근(柳瑾), 어문학자 유희(柳僖), 시인 홍사용(洪思容) 등이 있다.

1963년 고삼면이 이웃 안성군으로 편입되었으며, 1973년에는 구성면 죽전리가 수지면에, 원삼면 가좌리가 외사면에 각각 편입되는 행정구역 조정이 있었다. 1979년 용인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1983년에는 수지면 하리·이의리가 수원시로, 남면 진목리·봉명리 일부가 평택군 진위면으로, 외사면 가좌리 일부가 원삼면으로 각각 편입되었다.

1985년 기흥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96년 용인군이 시로 승격되면서 외사면을 백암면으로, 내사면이 양지면으로 개칭되었고, 수지면이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중앙동·역삼동·유림동·동부동이 신설되는 등 행정상 많은 변화를 거쳤다.

2000년 9월 1일 구성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2001년 12월 24일에는 수지읍이 수지출장소로 승격되었고, 이 때 풍덕천 1·2동, 죽전 1·2동, 동천동, 상현동의 6개 동이 신설되었다. 이로써 용인시는 1개 출장소 2개 읍 7개 면 107개 법정 리·동이 되었다. 2003년에는 상현동이 분동되어 성복동이 신설되었다. 2005년 10월 31일 ,처인구기흥구, 수지구 등 3개 구가 설치되면서 수지출장소가 수지구청으로 승격되었고, 기흥읍과 구성읍이 기흥구로, 시 동부지역이 처인구로 각각 승격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2007년 7월에 기흥구에 동백동이 설치되었다.

경부고속도로·영동고속도로가 개통된 1970년대 이후부터 각종 산업시설이 많이 유치되고 서울에 가까운 수도권지역으로서의 이점을 살리면서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유물·유적

포곡읍 가실리에 있는 호암미술관과 기흥구 상갈동에 있는 경기도박물관, 남사면 완장리의 경기도향토사료실 등에 국보·보물급 문화재들이 많이 소장되어 있으며, 선사시대의 유물·유적으로부터 무형문화재에 이르기까지 많은 문화재들이 보존되어 있는 지역이다.

선사시대의 유물로는 모현면 왕산리의 용인 완산리 지석묘(경기도 기념물, 1974년 지정), 양지면의 용인 주북리 지석묘(경기도 문화재자료, 1983년 지정)를 비롯하여 구성면 상하리에 북방식고인돌이 있다. 원삼면의 용인 맹리 지석묘(경기도 문화재자료, 1985년 지정)와 백암면 근삼리 두 곳에는 남방식고인돌이 있다.

또 용인 창리 선돌(경기도 문화재자료, 1985년 지정), 원삼면 사암리, 포곡읍 신원리 등 세 곳에 선돌[立石]이 있으며, 마평동 석담마을에는 적석총이 있다.

그 밖에도 이동면 덕성리, 구성면 보정리 연원마을, 원삼면 창리, 남동 옥현마을 등지에서 신석기유물인 마제돌칼·돌도끼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1965년에는 모현면 초부리에서 세형동검의 제작에 사용되었던 거푸집[鎔范]이 3개나 출토되어 청동기 문화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관방 유적으로는 삼국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전하는 할미산성과 석성산성(일명 보개산성)이 있다. 토성지로 남사면 아곡리의 처인성(경기도 기념물, 1977년 지정), 원삼면 맹리의 행군이토성지, 좌항리의 태봉산토성지 등이 있다.

불교문화재로는 신봉동의 용인 서봉사지 현오국사탑비(보물, 1963년 지정), 원삼면 문촌리의 문수산마애보살상(경기도 유형문화재, 1984년 지정) 2구,를 비롯하여 기흥읍의 용인공세리오층석탑(경기도 문화재자료, 1983년 지정), 이동면의 용인어비리삼층석탑(경기도 유형문화재, 2004년 지정), 백암면의 용천리오층석탑, 구성면의 마북리탑재 등 고려시대의 유물·유적이 있다.

석불은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용인목신리석조여래입상(경기도 문화재자료, 1985년 지정), 이동면의 천리석조여래입상 등이 있고, 고려시대의 것으로는 원삼면의 용인미평리약사여래입상(경기도 문화재자료, 1983년 지정), 기흥읍의 공세리석조여래좌상, 이동면 묵리에 용덕사석조여래입상(경기도 문화재자료, 2001년 지정) 등이 대표적이다.

그 밖에 조선 초기에 무학대사가 조성한 것으로 전하는 백련암18나한상이 있다. 용덕사석조여래유희좌상은 기림사의 건칠보살상과 맥락을 함께 하고 있어 주목되고 있다. 사지로는 박곡사지·서봉사지·문수사지 등이 있다.

유교문화재로는 모현면 능원리의 충렬서원(경기도 유형문화재, 1972년 지정)과 상현동의 심곡서원(경기도 유형문화재, 1972년 지정), 구성면 언남리의 용인향교, 양지면 양지리의 양지향교(경기도 문화재자료, 1983년 지정) 등이 있다.

고건축으로는 기묘명현인 조광조(趙光祖)·이자(李耔)·조광좌(趙光佐)·조광보(趙光輔) 등 네 선비가 모여 장수강학하던 사은정이 기흥읍 지곡리에, 남구만사당이 모현면 갈담리에, 포은사당이 능원리에 있고, 용인정영대가옥과 용인 이주국 장군 고택(경기도 문화재자료, 2000년 지정)이 원삼면 문촌리에, 용인 한산이씨 음애공파 고택(경기도 민속자료, 1997년 지정)이 기흥읍 갈곡리에 있다.

능묘로는 고기동의 이종무장군묘(경기도 기념물, 1975년 지정), 모현면 능원리의 정몽주선생묘(경기도 기념물, 1972년 지정)와 채제공 선생 묘경기도 기념물, 1973년 지정), 오산리의 오윤겸선생묘(경기도 기념물, 1987년 지정), 역북동의 정조 어제 채제공 뇌문비(경기도 유형문화재, 1978년 지정)·채제공선생묘(경기도 기념물, 1973년 지정), 백암면 석천리의 유형원선생묘(경기도 기념물, 1976년 지정), 상현동의 문정공조광조묘 및 신도비(경기도 기념물, 1999년 지정), 지곡동에 음애이자묘역(경기도 기념물, 2000년 지정)이 있다.

또한 구성읍 마북리의 민영환선생묘(경기도 기념물, 1973년 지정), 남사면 완장리의 심대장군묘(경기도 기념물, 1972년 지정) 등이 이곳에 있다. 이외 양지면 제인리에 공안공정옥형·충정공정응두신도비(경기도 문화재자료, 1996년 지정), 죽전동에 문간공김세필묘역일원(경기도 문화재자료, 1999년 지정), 기흥읍 공세리에 최유경묘역(경기도 문화재자료, 2003년 지정) 등이 있다.

한편 묘현면 오산리에 쇄미록(보물, 1991년 지정), 마북동에 오명항 초상 및 양무공신교서(보물, 1993년 지정), 모현면 갈담리에 남은유서분재기부남재왕지(보물, 1993년 지정) 등은 이 시의 주요 문서 유적 들이다.

이동면의 용인서리고려백자요지(사적, 1989년 지정)와 백암면 고안리의 분청사기도요지(경기도 문화재자료, 1985년 지정) 등도 주요사적지로 손꼽히고 있다.

무형문화재로 기흥읍 지곡리에 줄타기(중요무형문화재, 1976년 지정), 보라리에 부의주(경기도 무형문화재, 1987년 지정), 백암면 박곡리에 군포당정옥로주(경기도 무형문화재, 1994년 지정), 기흥읍 보라리에 악기장(현악기)(경기도 무형문화재, 1999년 지정) 등이 있다.

교육·문화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으로는 향교와 서원이 있는데, 1400년에 창건된 용인향교가 그 최초이며, 다음이 1523년(중종 18)에 창건된 양지향교이다. 그리고 1576년(선조 9)에 설립된 충렬서원, 1650년에 설립된 심곡서원이 등이 있다. 이 밖에 정종조에 세워졌던 한천서원은 대원군 집정시에 훼철되었다.

근대교육의 태동은 심곡서원의 명륜당에서 시작된 명륜학원으로 문정중학교의 전신이기도 하다. 1940년에 설립된 태성학원이 중등 교육기관으로서는 최초이며, 뒤를 이어 1954년에 공립학교인 용인중고등학교가 문을 열었다.

1950년대에는 문맹퇴치를 위한 야학이 있었고, 교육시설과 교육의 기회가 적었던 1960년대에는 재건학교 또는 고등공민학교 등의 명칭으로 개설된 교육운동이 자원봉사와 배우려는 열기로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점도 이 고장 특색 중의 하나였다.

2015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00개교, 중학교 50개교, 고등학교 30개교, 특수학교 1개교가 있으며, 단국대학교 죽전캠퍼스·경희대학교 국제캠퍼스·강남대학교·명지대학교 자연캠퍼스·한국외국어대학교 글로벌캠퍼스·칼빈대학교·용인대학교·루터대학교·용인송담대학교 등이 있다.

교육문화시설로는 삼성그룹연수원·지적공사연수원·대한항공연수원을 비롯한 연수원이 많고, 서울특별시 교육위원회 시설인 걸스카우트 야영장이 모현면 일산리에 있다. 문화시설로는 1965년에 설립된 군립도서관과 1950년대에 건립된 용인문화원이 있다.

용인문화원은 이 고장 문화예술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또한, 이 고장 유일의 문예창작집인 『용구문화』를 발행하는 한편, 향토문화축제인 용구문화제를 주관하고 있다.

민속

이 고장의 중요한 민속놀이로는 줄다리기(고싸움)와 「타작노동요」를 들 수 있다. 이 민속놀이들은 예로부터 우리나라 중부지방 여러 곳에서 성행하던 것으로, 줄다리기는 음력 정월대보름날 달맞이가 끝난 다음 시작되는데, 남사면 봉무리에서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며, 대략 조선 숙종 때부터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줄다리기는 우선 짚으로 줄을 꼬아 만들며, 암줄의 머리부분은 지름이 70∼80㎝ 정도이고 수줄은 조금 작게 하며 본줄 옆에 곁줄(다림줄)을 만들어 이 줄을 잡고 당기게 한다. 암줄은 부녀자와 미혼남성이, 수줄은 기혼남성이 각각 잡고 3전 2승으로 승부를 가름한다.

이 놀이가 시작되기 전에 농악대와 함께 줄을 메고 동리를 돌며 우물고사를 지내고 절을 하며 도는 것이 보통이다. 또한 놀이가 시작되기 3일 전부터는 외부와의 통행을 금하고 있다. 이 놀이는 마을의 액운을 막고 질병을 물리치는 등 흉사를 예방하는 데 뜻이 있다고 하며, 수줄이 이기면 쌀풍년이, 암줄이 이기면 보리풍년이 든다고 한다.

「타작노동요」는 예로부터 이동면 묘봉리와 백암면 석천리 등 여러 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농사를 지을 때 주민들의 단합과 친목 그리고 공동작업으로 능률을 올리기 위해 가락을 맞추어 노래부르며 일하는 것이다. 특히 도리깨질이며 태질꾼·부뚜질·키질·비질 등 북소리에 맞추어 노동요를 부르며 흥겹게 타작이 진행된다.

그 밖에 재앙을 면하게 해준다는 거북놀이·서리·복조리·터줏가리 등 세시풍속이 남아 내려오고 있다.

동제는 유래가 약 200년 전으로 추정되는데, 원삼면 맹리 맹골마을에서는 뒷산인 건지산의 산신제를 매년 음력 10월중에 택일하여 밤 9시경에 지내고 있다. 산중턱의 오래된 소나무 100여 주가 있는 곳에 예로부터 제단이 마련되어 있으며, 햇곡식과 햇과일로 제물을 차리고 시루떡은 물론 소 한 마리를 통째로 바치는 등 절차가 엄격한 관례로 규제되고 있다.

특히 제관(祭官)은 생기복덕(生氣福德)에 맞는 사람으로서 상제관과 부제관을 정한다. 제물은 낮에 제단에 미리 차려놓고, 밤에 제관만 올라가서 제를 지내는 것이 특이한 것이다.

산신제가 끝나면 마을사람들이 모두 모여 술과 고기와 떡을 나누어 먹으면서 엄숙하게 이날 하루를 보낸다. 운학동, 이동면 덕성리, 양지면 송문리에서도 각각 산신제를 지내고 있으며, 그 절차나 형식에 있어서는 모두 대동소이하다.

설화·민요

이 고장에서 전래되고 있는 전설로 「생거진천사거용인(生居鎭川死居龍仁)」이 있다. 이 전설은 이동면 묘봉리에서 유래된 이야기로, 이 마을의 한 젊은 남자가 산등성이에서 낮잠을 자다가 산꼭대기로부터 굴러내려온 수천 근 되는 바위에 깔려서 죽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혼령이 저승의 염라대왕에게 갔는데, 아직 천수가 다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다시 이승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하지만 시신이 바윗덩이에 눌린 채 이미 흙으로 덮였으므로 접신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던 혼령은, 충청도 진천의 어느 부잣집의 죽은 지 얼마 안 된 외아들의 몸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다시 살아난 그는 진천의 아내와 함께 이동면 묘봉리의 아내도 거느려 각각 자식을 삼형제씩 두게 되었는데, 드디어 천수를 다한 그가 죽게 되자 용인과 진천의 아들들 사이에서 혼백다툼이 생기게 되었다.

이 송사를 받은 진천군수는 그가 살아서는 진천에 있었으니 죽어서는 용인으로 가라는 판결을 내려, 결국 용인의 아들들이 제사를 모시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또 병자호란 때 끝까지 항복을 반대하여 청나라로 끌려가 처형당한 삼학사 중의 한 사람인 오달제(吳達濟)가 출생한 곳이 원삼면 학일리 고초동이라 한다. 그가 태어날 적에 마을의 초목이 모두 말라죽었다 하여 마을의 이름이 ‘고초동(枯草洞)’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양지면 양지리의 등촌마을에는 마을과 관련해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옛날 이 마을에 원님이 부임하여 올 때는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이 산골로 귀양보내나.”하고 통곡하며 들어왔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부임하여 몇 해 지내보면, 장작불에 쌀밥을 먹을 정도로 풍부한 물산에 주민들의 인심까지 좋아서 그 원님이 다른 곳으로 부임하여 갈 때 다시 통곡하며 떠난다고 하여, 이 마을을 ‘들통곡 날통곡’이라 하기도 하였다 한다.

이 밖에 모든 소원을 들어준다는 「언청이미륵의 전설」, 힘내기를 하여 목숨을 잃은 남매의 이야기인 「석성(石城)의 전설」, 경기도 일대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 「이완대장이야기」·「달래내고개전설」 등이 이 고장에도 전승되고 있다.

이 고장에 구비전승되는 민요는 노동요, 그 중에도 논매기소리가 주종을 이루고 있고, 그 다음으로 애정요와 타령요 등이 많다. 이 지방의 향토색이 짙은 노래로는 「찍었네타령」(논매기소리)을 비롯하여 「꼴노래」·「지게동발」·「둘레타령」·「홀아비소리」(애정요) 등을 들 수가 있다.

그 중 「찍었네타령」의 일부를 소개하면 “……/ 오조를 갈고 움머쇠야/ 어하어흠차 찍었네(후렴)/ 움머리는 웃머새야/ 청차조 심어 움머새야/ 새야새야 앉지 말아/ 커다란 처녀 몸닳는구나/ 새야새야 앉지 말아/ 커다란 처녀 울고 앉았네/ 우워∼내혀/…….”와 같다.

이것은 호미로 논매는 시늉을 “어하 어흠차 찍었네”라고 하여 후렴으로 부르고 있다. 가사는 연정을 제재로 하여 힘든 것을 잊고 빨리 일을 마치어 음식을 먹으며 놀자는 내용이며, 가락은 단조로우나 장단은 일의 속도에 따라 변화된다.

그리고 「홀아비소리」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무엇을 믿고 잠이 오나/ 반겨줄 이 하나 없고/ 신부 생각에 잠 못 이뤄/ 새벽서리 찬 바람에/ 울고 가는 저 기럭아/ 너도 나와 짝을 잃어/ 울고 가는 게로구나.”이 노래는 잠 못 이루는 홀아비의 심정을 소박하게 잘 표현하고 있는 희귀한 노래이다.

그리고 「지게동발」은 나무꾼이 지게목발을 두들기면서 부르는 노래로, 지게 지는 신세에 대한 넋두리가 내용이다. 가락은 흥겨운 창부가락이지만 가사는 매우 애상적이다. 「꼴노래」도 신세를 한탄하는 내용은 비슷하나 문답형식인 점이 다르다.

산업·교통

전 토지의 53%가 임야이고 농경지는 전체토지의 22%, 대지 5%, 하천 2.3%, 도로 3.0%이다. 주요 저수지는 이동저수지·기흥저수지·송전저수지·지곡저수지 등이 있어 주변의 농경지에 관개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경지 중 논은 5,065ha, 밭은 3,340ha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 이외에 밭작물로 배추·무·고추·오이·호박·수박·마늘·파·시금치, 과실류로 사과, 특용작물로 인삼이 있다. 옛날에는 연근·면화 등이 생산되었으나 최근에는 용삼이 일부 농가에서 생산되고 있다.

대도시에 인접하고 대도시와의 접근성이 높아 목장·화훼단지·수목원이 발달하고 있다. 산지가 많은 이곳은 밤·도토리·은행·대추·호두 그리고 표고버섯 등이 생산된다. 농가인구는 1980년에는 전체인구의 1/2에 이르렀으나 1995년에는 15.7%인 3만 8269명, 2008년에는 전체인구의 3.3%인 2만 7222명으로 감소하였다.

제조업 인구는 수도권 공장의 지방분산정책과 경부고속도로와 영동고속도로의 개통으로 많은 생산업체들이 기흥공업단지를 비롯해 용인 등지에 건설되면서 제조업인구가 급격히 늘었다. 2008년 현재 제조업 인구는 전체 인구의 5.1%이다. 주요 광산물로 고령토·장석 등이 생산되고, 제조업으로 조립금속업·화학공업·종이인쇄업·섬유공업·식료품공업 등이 발달하였다.

상업시설로 용인시내와 백암면에 정기시장이 열리고 용인에는 상설시장·연쇄점 등이 있어 주민에게 생활필수품이 원활히 공급된다. 그리고 경기도에서 금융기관이 가장 많은 지역 중의 하나이다.

2개의 고속도로와 4개의 국도가 지나고 있어 교통이 편리하며, 도로는 경부고속도로가 서북쪽에서 남북으로 지나고 영동고속도로가 신갈에서 동서로 지나고 있다. 국도 45호선이 군의 중심부를 남북으로 지나고 국도 42호선이 군의 중심부를 동서로 지나고 있다. 국도 43호선은 동북단을 서남∼동북방향으로 지나 북상하고 국도 17호선이 양지면에서 국도 42호선과 분기하여 동남진하고 있다.

철도는 수려선(수원∼여주)이 지나고 있었으나 1972년 영동고속도로의 개설로 철거되었다. 용인 에버랜드유원지·콘도·골프장 등 위락시설이 입지하고 있어 주말에는 통행량이 많아 교통 혼잡이 심하다. 1994년부터 개통을 시작한 분당선의 죽전~상갈 구간이 용인시를 지나고 있으며, 2016년 신분당선의 정자~광교 구간이 개통하면서 동천~상현 구간이 용인시를 지나게 되었다. 또한, 용인경전철이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관광

용인에는 한국민속촌·에버랜드 내에 호암미술관이 있으며, 경기도박물관·절터·묘·석탑·향교 등이 있어 문화 역사의 고장으로 경기지역 최대의 관광지이다. 특히, 동양 최대의 사립박물관 겸 미술관을 비롯한 향토사료관·상업사박물관·등잔박물관 등도 있어 조상의 숨결과 문화를 느낄 수 있는 관광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겨울이면 즐기는 스키장 및 눈썰매장이 여러개나 있어 겨울 관광명소가 되고 있으며, 곳곳에 골프장 20개소가 있어 골프장을 찾는 사람이 많다.

그 외의 주변 관광지로서는 수지읍 상현리의 심곡서원, 고기리의 이종무장군묘, 모현면 능원리의 충열서원·정몽주묘, 왕산리의 모현지석묘, 원삼면 문촌리의 문수사절터, 남사면 아곡리의 처인성터, 양지면 양지리의 양지향교, 주북리의 북방식 지석묘, 남사면 창리에 선돌, 원삼면 옥신리의 석조여래입상, 구성면 언남리의 용인향교, 고안리의 분청사기그릇굽던터, 마북리의 민영환묘 등이 있다.

특히 역사에 남은 인물들의 묘가 많아 관광지로 유명해졌다. 예로부터 용인을 가리켜서 ‘살아서는 진천이오 죽어서는 용인’이라 할 만큼 좋은 묘자리가 많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닭이 알을 품고 있는 것과 같은 지형을 이루고 있어 주변의 안성·이천·수원·평택·화성·광주·성남과 경계를 이루며 고개가 많은 곳으로도 유명하다. 그 대표적인 고개는 무푸레고개·정수리고개·박석고개·대지고개 등이다.

이와 같이 산과 평지의 높낮이가 심한 고장이라서 일찍부터 수렵과 농경이 가능했던 지역이다. 특히, 전국에서 유일한 고려시대의 백자도요지가 서리 중턱마을에 신비스러움을 품고 있어 관광명소로 기대된다.

구(區)
  1. 기흥구(器興區)

시의 서부에 위치한 구. 면적 81.68㎢, 인구 40만 9162명(2015년 현재). 구청 소재지는 구갈동이다.

본래 용인군 기곡면과 읍내면 지역이었다. 기흥 지역은 사기막골의 이름을 따서 기곡면이라 하여 하갈천·행의·한의 등 12개 리를 관할하였다. 그리고 구성 지역은 읍내면이라 하여 마곡·북동·남동 등 4개 리를 관할하였다.

기흥 지역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구흥면(駒興面)의 대부분, 지내면(枝內面)의 영통(靈通)과 덕동(德洞) 일부가 병합되어 기곡과 구흥의 이름을 따서 기흥면이 되었다. 1985년 읍으로 승격되었다.

구성 지역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동변면(東邊面) 전체와 구흥면(駒興面)·수진면(水眞面)·서변면(西邊面)의 각 일부가 병합되어 8개 리를 관할하였고 읍내와 동변·서변·수진의 3면이 합한 이름을 따서 읍삼면(邑三面)이 되었다. 1931년 구성면으로 개칭되었으며, 1973년에 죽전리가 수지면으로 편입되었다.

1996년 3월 1일 용인군이 도농복합 형태의 시로 설치된 후 각각 기흥읍과 구성면으로 출발하였다. 2000년 9월 1일 구성면이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2005년 10월 31일 기흥읍과 구성읍이 함께 기흥구로 승격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서쪽에 청명산(淸明山, 192m)과 남부의 일부지역을 제외하고는 평지에 가까운 지형이다. 동부에 산지가 분포하는데, 북동쪽 경계에 법화산(法華山, 385m)과 남동쪽에 성산(城山, 472m) 등이 솟아 있다. 남단에 넓은 면적을 차지하는 신갈저수지로 흘러드는 지곡천(芝谷川)과 오산천(烏山川) 주변 지역에 충적평야가 분포한다. 서부는 낮은 구릉지를 이루며 구 중앙부를 흐르는 탄천(炭川) 유역에 충적지가 전개되어 있다. 논농사가 밭농사보다 다소 우세하나 경지면적은 시에서 제일 협소한 편이다. 도시화가 크게 진전된 지역인 만큼 경지면적이 점점 줄어들고, 농업 종사인구도 급감하는 추세이다.

주요 농산물은 쌀을 비롯하여 보리·콩 등의 맥류나 두류의 경작도 이루어지며, 축산업으로는 돼지·닭·산양 등의 사육이 행해진다. 제조업은 많은 공장이 입지한 기흥공업단지를 들 수 있고, 특히 식품·섬유·제지·화학·의약품·합성수지·도자기·기계·전자 분야의 발전이 두드러진다.

이 지역은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급속히 발전한 신흥도시로 급격한 인구증가를 보인다. 더욱이 1990년대 중반 이후 대규모 아파트 단지까지 들어서 폭발적인 외래인구의 유입과 함께 상권이 크게 형성되어 있다.

특히, 북부지역에 있는 신갈인터체인지는 경부고속도로와 영동고속도로, 그리고 신갈∼인천간의 고속도로가 만나는 교통의 분기점이자 요충지 역할을 담당한다. 42번 국도가 읍의 북중앙을 횡단하고, 393번 지방도가 남단에서 북단으로 종단하며 343번 지방도가 남서쪽에서 중앙쪽의 교통편의를 제공한다. 이밖에 시·도 등 각종 도로망이 정비되어 교통이 편리하다.

사통팔달의 교통망에다 수도권에 인접한 지리적인 이점을 갖춘 까닭에 골프장, 실내외 수영장, 각 기업의 연수원, 체육관 등 관광레저·스포츠 시설이 즐비하다.

문화유적은 상갈동의 경기도 도립박물관에 초본대방광불화엄경주본, 궤장 및 사궤장연회도첩·천태사교의·진언권공·청흥군이중노정사공신교서·청원군심대호성공신교서·인목대비친필족자·조영복선생영정·연행일록부연행별장외 명현간찰·서거정선생묘지석 등이 있다.

그 밖에 지곡동에 사은정, 공세동에 석조여래입상과 오층석탑이 있다. 관광지로는 보라동에 한국민속촌이 있다. 그리고 상하동에 고인돌, 마북동에 오명항영정병함부양무공신교서·민영환의 묘와 언남동에 용인향교가 있다.

신갈(新葛)·구갈(舊葛)·상갈(上葛)·하갈(下葛)·보라(甫羅)·지곡(芝谷)·공세(貢稅)·고매(古梅)·농서(農書)·서천(書川)·영덕(靈德)·언남(彦南)·마북(麻北)·청덕(淸德)·동백(東栢)·중(中)·상하(上下)·보정(寶亭) 등 18개 동이 있다.

  1. 수지구(水枝區)

시의 북서단에 위치한 구. 면적 42.10㎢, 인구 34만 5237명(2015년 현재). 구청 소재지는 풍덕천동이다.

본래 용인군 지역으로 수진면(水眞面)이라 하여 손기·고분·서봉 등 9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지내면(枝內面)이 병합되어 8개 리를 관할하면서 수진과 지내의 이름을 따서 수지면이 되었다. 1973년 구성면의 죽전리가 편입되었고, 1983년 하리(下里)와 이의리(二儀里)가 수원시로 이속되어, 1996년 용인군이 시로 승격될 때 읍으로 승격되었다. 2005년 10월 31일 구로 승격되어 수지구청이 설치되었다.

산지는 서쪽 수원시와의 경계에 집중되는데, 대표적인 산으로 바라산(428m)·백운산(白雲山, 564m)·광교산·형제봉 등이다. 나머지 지역은 구릉지와 충적지가 펼쳐진다. 구 중앙을 정평천(亭坪川)이 관류하면서 연안에 평야지대를 만들었다.

밭농사와 논농사의 비율이 비슷하며, 미곡 외에 맥류와 두류가 산출된다. 1980년대 중반부터 근교농업으로 지역 특산물인 수지화훼단지가 조성되어 서울 강남 이남의 화훼상권을 주도하고 있다. 일부 목장지대에서 양계를 비롯하여 한우·산양 등의 사육이 행하여진다. 제조업으로는 목제품·식품·섬유·금속·전자제품 관련 업체가 다수 분포한다.

동부에 경부고속도로가 종단하고, 남단에 수원시와 광주읍을 연결하는 43번 국도가 시원스럽게 횡단한다. 이외에 1·14번 시도 등 각종 도로망이 계속 확충되면서 사방을 연결하고 있다.

분당 신도시와 인접하여 직·간접적으로 수도권에 연결되어 도시화의 추세가 빠르게 이루어지고, 특히 1990년대 중반 이후 수지지구 대단위 아파트의 건립으로 계속해서 인구가 격증하여 원래의 마을들이 많이 사라지고 있다. 문화유적은 고기동에 이종무 장군 묘, 신봉동에 서봉사현오국사탑비, 상현동에 심곡서원이 있다.

풍덕천(豊德川)·죽전(竹田)·동천(東川)·고기(古基)·신봉(新鳳)·성복(星福)·상현(上峴) 등 7개 동이 있다.

  1. 처인구(處仁區)

시의 동남부 대부분에 위치한 구. 면적 467.55㎢, 인구 22만 1347명(2015년 현재). 구청 소재지는 김량장동이다.

본래 용인군 포곡읍·모현면·양지면·원삼면·이동면·백암면·남사면 지역으로, 2005년 10월 31일 구로 승격하여 1개 읍 6개 면 4개 동을 관할하고 있다.

①포곡읍(蒲谷邑)

구의 북부에 위치한 읍. 면적 41.74㎢, 인구 3만 4087명(2015년 현재). 읍 소재지는 삼계리이다.

본래 용인군 지역으로 경안천이 면의 중앙을 흐르므로 포곡면이라 하여 당곡·두계·토도 등 18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수여면(水餘面)의 금천리(金川里)·어매리(魚梅里)가 합쳐져 9개 리로 개편되었다. 1996년 시로 승격될 때 편입되었다. 2005년 10월 31일 처인구청의 신설과 함께 읍으로 승격되어 처인구에 편입되었다.

산지로 남서쪽 경계에 성산이 솟아 있고, 서부와 동부는 낮은 구릉지이거나 평지가 분포한다. 경안천이 면의 중앙부를 남북으로 길게 가로지르고, 금어천(金魚川)이 동부를 흘러 중앙의 경안천과 합류하면서 띠모양의 평야가 펼쳐진다. 논농사가 밭농사보다 다소 우세한 지역으로, 주로 성저(城底)·양어(養魚)·유실(留室) 등의 저수지를 통해 관개용수를 공급받는다.

주요 농산물은 미곡 외에 두류의 산출량이 많다. 축산업으로 한우·젖소·돼지·닭·사슴 등의 사육 농가가 다수 분포하고, 특히 돼지·사슴 등의 사육량이 많은 편이다. 농업 종사인구가 격감하고 있는 반면, 경공업과 상업 등에 종사하는 인구가 늘어나는 추세로 도시화의 성격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특산물로는 과거 명성을 떨쳤던 용삼이 있다. 양조·합성수지·도자기·전기전자 관련 제조업체가 들어서 있다.

교통으로 영동고속도로가 마성인터체인지를 지나 남서부를 통과하고, 45번 국도가 남북을 종단하면서 광주시와 시의 중심부를 연결한다. 이 밖에 10·12번 시도 등 각종 도로망이 촘촘한 그물망을 치고 있다.

문화유적은 가실리의 백련암(白蓮庵)을 비롯하여 호암미술관에 금동신묘명삼존불(金銅辛卯銘三尊佛)을 비롯하여 국보와 금동여래입상(金銅如來立像)을 비롯한 보물 등이 있다. 전대리·가실리 등에 걸쳐 있는 에버랜드는 시의 대표적인 관광명소이다. 이 밖에 석성산성(일명 보개산성), 신대리에 선돌, 마성리에 고분 등이 있다. 전대리에는 수령 500년 이상된 은행나무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삼계(三溪)·금어(金魚)·둔전(屯田)·영문(英門)·마성(麻城)·가실(稼室)·전대(前垈)·유운(留雲)·신원(新院) 등 9개 리가 있다.

②남사면(南四面)

구의 남서단에 위치한 면. 면적 58.64㎢, 인구 7,082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봉무리이다.

본래 용인군 현내면 지역으로 아곡·남산·매릉 등 7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서촌면(西村面)·도촌면(道村面)·남촌면(南村面)의 대부분과 진위군(振威郡) 일북면(一北面) 월경리(月境里)가 병합되어 군의 남쪽 4면이라는 뜻으로 남사면이라 하여 11개 리를 두고 남사면이 되었다. 1983년 진목리와 봉명리의 일부가 평택군의 진위면으로 이속되었다. 1996년 시로 승격될 때 편입되었다. 2005년 구청의 신설로 처인구에 편입되었다.

북부 면의 경계에 함봉산·달봉산(達峰山, 203m)의 자락이 면 중심부를 향해 뻗어 있다. 진위천을 비롯하여 완장천(完庄川)·봉무천(鳳舞川) 등이 면 곳곳을 관류하면서 완장·아곡·북리·창리 등의 저수지를 조성해 놓았다. 이곳에서 풍부한 관개용수를 공급받는 넓은 평야지대가 넓게 분포해 있다. 북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평탄한 지형에 가깝다.

시 전체에서 농가 비율이 제일 높고 주로 논농사가 행해진다. 이 외에도 두류의 산출량이 많고 특용작물 및 원예작물의 경작도 활발하다. 또한, 축산업의 한우·젖소·돼지·닭·토끼·오리 등이 사육되는데, 특히 토끼·오리의 사육량이 많다.

제조업을 비롯한 공업관련 시설은 상대적으로 낙후한 지역이나, 섬유·합성수지·기계·목제품 관련 제조업체가 분포한다. 도시기반 시설이 확충되지 않은 까닭에 인구수의 변동폭이 거의 없는 지역에 속한다.

교통은 경부고속도로가 남서부를 종단하고, 387번 지방도가 면의 서쪽에서 남단을 잇고 302번 지방도가 면 중앙을 횡단한다. 이 밖에도 7·9·11번 시도 등이 곳곳의 교통편의를 돕는 등 비교적 편리한 교통망을 갖추었다. 문화유적은 아곡리에 처인성지, 완장리에 심대장군묘와 효자열녀문, 창리에 선돌이 있다.

봉무(鳳舞)·북(北)·통삼(通三)·봉명(鳳鳴)·진목(眞木)·원암(元巖)·방아(防牙)·전궁(全宮)·창(倉)·아곡(衙谷)·완장(完庄) 등 11개 리가 있다.

③모현면(慕賢面)

구의 최북단 중앙에서 동쪽에 걸쳐 위치한 면. 면적 50.37㎢, 인구 2만 5282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왕산리이다.

본래 용인군 지역으로 고려 충신 정몽주의 무덤이 있어 그의 어짊을 기리어 모현면이 되어 초하·부곡·갈월 등 16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초부·갈담 등 8개 리로 병합되었고, 1996년 시로 승격될 때 편입되었다. 2005년 10월 31일 구청의 신설로 처인구에 편입되었다.

동부 경계에 노고봉·정광산(正光山, 524m) 등 비교적 높은 산지가 있고, 서부지역도 중앙에 문수산(文秀山, 222m)과 구성면과의 경계에 법화산 등 산지가 많다. 동부는 동쪽 끝의 산지를 제외하고는 충적지와 평탄한 지형을 나타낸다.

경안천이 동부 중앙을 남쪽에서 북쪽으로 관통하면서 매산천이 흘러들고, 주변 일대에 충적평야를 만들었다. 경지면적이 넓은 편은 못되나, 논농사가 밭농사보다 다소 우세한 지역이다.

주요 농산물은 미곡을 중심으로 원예작물의 재배도 활발하다. 특산물로는 과거 진상품이었던 용삼이 있다. 일부 농가에서는 한우·젖소·돼지·닭·산양·사슴 등의 가축이 사육되며, 특히 왕산리일대에서는 오골계가 사육되고 있다.

산간지역이 많은 지역으로 농촌의 특색을 강하게 띠어 왔으나, 서울 및 성남 등지에서 이전한 기업체와 골프장 등 위락시설이 들어와 도시형태로 변모하면서 농업인구가 계속 감소추세에 있다. 이에 반해 제조업 종사자는 늘고 있는데, 섬유·화학·시멘트·금속·기계 관련 업체가 다수 분포한다.

교통은 43번 국도가 서부의 북단을 횡단하면서 수원시와 광주읍을 연결하고, 45번 국도가 동부의 중앙을 종단하는 가운데 시의 중심부와 광주시를 잇는다. 문화유적은 오산리에 쇄미록(0xF68C尾錄), 일산리에 유수영정병함(柳綏影幀幷函), 갈담리에 남구만사당, 능원리에 정몽주묘와 충렬서원(忠烈書院), 왕산리에 모현지석묘가 있다.

왕산(旺山)·갈담(葛潭)·초부(草芙)·일산(日山)·매산(梅山)·동림(東林)·능원(陵院)·오산(吳山) 등 8개 리가 있다.

④백암면(白巖面)

구의 남동단에 위치한 면. 면적 65.70㎢, 인구 9,156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백암리이다.

본래 죽산군(竹山郡) 지역으로 근삼면이라 하여 협동·가곡·내창 등 14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근일면(近一面)의 용천하 등 12개 리와 원삼면(遠三面) 일부, 양지군 박곡면(朴谷面)·고안면(高安面)의 5개 리가 병합되어 용인읍내 바깥쪽 4면으로 되었다는 뜻으로 외사면이라 하여 가창·백암 등 12개 리를 관할하였다. 1973년에 원삼면의 가좌리가 편입되었고, 1996년 군이 시로 승격되었을 때 면의 명칭이 외사면에서 백암면으로 개칭되었다. 2005년 구청의 신설로 처인구에 편입되었다.

북부 경계에 수정산·봉의산(鳳儀山, 315m)·대덕산(大德山, 309m) 등이 차례로 솟아 있고, 남서쪽 경계에 구봉산(九峰山, 465m) 자락이 면 전체를 감싸 안고 있다.

이들 산지 사이에 청미천이 여러 갈래를 이루면서 길게 남류하는 가운데 시 전체에서 제일 넓은 경지를 조성해 놓았다. 서남부와 동북부의 산지를 제외한 중앙부는 낮은 구릉지와 충적지로서 평탄한 지형이다. 논과 밭의 면적 모두가 시 전체에서 제일 넓게 분포하지만 논농사가 우세한 지역이다.

주요 농산물은 미곡을 비롯하여 보리·콩·고구마 등의 곡식은 물론이고 깨·채소·고추 등의 채소류, 사과·포도 등의 과일류 생산량도 많다. 산간지역에는 뽕나무밭이 많아 생사(生絲) 생산량도 많으며, 특산물로는 인삼·잎담배 등도 많이 생산된다.

뿐만 아니라 시 전체에서 제일 넓은 목장용지가 분포하여 목축산업이 발달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갖추었다. 특히, 한우·젖소·돼지·닭·오리 등의 사육은 다른 지역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많고, 그리고 사슴·산양 등도 사육된다. 제조업 분야로는 이 지역의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도자기 산업 이외에 합성수지·금속·전기전자 관련 업체가 자리 잡고 있다.

교통은 17번 국도가 남서쪽에서 북동쪽으로 대각선 방향으로 종단하면서 19·21·23·25번 시도 등과 곳곳에서 만나 교통은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석천리에 유형원묘, 근삼리에 고인돌, 고안리에 분청사기도요지, 백봉리에 사지(寺址)·삼층석탑·석불좌상, 근삼리에 고인돌, 박곡리에 사지(寺址), 가창리에 정원사·미륵입상, 용천리에 탑재 등이 있다.

백암(白巖)·박곡(朴谷)·백봉(栢峰)·고안(高安)·옥산(玉山)·장평(長坪)·석천(石川)·용천(湧泉)·근삼(近三)·근창(近倉)·근곡(近谷)·가창(稼倉)·가좌(加佐) 등 13개 리가 있다.

⑤양지면(陽智面)

구의 동부에 위치한 면. 면적 57.68㎢, 인구 1만 7218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양지리이다.

본래 양지군 지역으로 양지 읍내가 되므로 읍내면이라 하여 교동·암곡 등 7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양지군의 주동면(朱東面)·주북면(朱北面)·주서면(朱西面)·읍내면(邑內面) 등 4개 면의 대부분이 병합되어 읍내와 주동의 주서·주북의 4개 면이 합해져 내사면이 되어 10개 리를 관할하였다. 1983년 진목·봉명리가 평택군 진위면에 이관되었고, 1996년 군이 시로 승격되었을 때, 면의 명칭이 내사면에서 양지면으로 개칭되었다. 2005년 10월 31일 구청의 신설로 처인구에 편입되었다.

높낮이가 다양한 산지가 곳곳에 분포하는데, 대표적인 산지로 북동부에 오봉산(418m)이 면 전체를 굽어보고 있고, 남서쪽 경계에 형제봉(兄弟峰, 264m)이 있다.

북부와 중앙을 관류하면서 물길이 서쪽으로 향하는 대대천(大垈川)·양지천(陽智川) 유역에 띠모양의 충적평야가 펼쳐져 있다. 대대저수지 등에서 농업용수를 공급받으나 경지율은 높은 편이 못된다. 밭농사와 논농사의 비율이 비슷하나 밭농사가 활발하다.

주요 농산물은 미곡 외에 감자·콩 등의 두류와 서류의 산출량이 많다. 이 밖에 원예 및 과수농업이 이루어진다. 축산업으로 젖소·돼지·닭·사슴 등의 사육두수가 많고, 양봉은 시 전체에서 제일 활발한 편이다. 제조업도 점차 발달하는 추세로, 대표적인 분야로 식품·섬유·합성수지·금속·전자 관련 업체 및 공장이 다수 분포한다.

교통망으로는 영동고속도로가 면 중앙을 횡단하면서 면 소재지에 위치한 양지인터체인지를 통해 수많은 사람과 물자를 실어 나르고 있다. 42번 국도가 면 중앙을 횡단하며 17번 국도가 남서쪽에서 중앙으로 향하고, 이 외에 10·13번 시도 등 각종 도로망을 구비하여 인근 시·군 지역을 연결한다.

문화유적은 양지리에 양지향교, 주북리에 고인돌, 관광지로 남곡리에 양지스키장은 겨울철 레저스포츠를 즐기려는 인파가 모여드는 장소이다.

양지(陽智)·남곡(南谷)·평창(坪倉)·제일(霽日)·추계(秋溪)·식금(植金)·정수(定水)·대대(大垈)·주북(朱北)·송문(松門) 등 10개 리가 있다.

⑥원삼면(遠三面)

구의 남동부에 위치한 면. 면적 60.16㎢, 인구 7,748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고당리이다.

본래 죽산군(竹山郡)지역으로 원삼면이라 하여 가좌·창동·두촌 등 9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원삼면의 일부와 원일면 전체, 양지군(陽智郡)의 주서면(朱西面)·목악면(木岳面) 일부 이와 근삼면(近三面) 석곡리(石谷里) 일부가 병합되어 12개 리로 개편되면서 다시 용인군 원삼면이 되었다. 1973년 가좌리가 외사면에 이속되었다가, 1983년 그 일부가 다시 원삼면으로 편입되면서 지금의 가재월리로 바뀌었다. 1996년 시로 승격될 때 편입되었다.

산지로는 북동쪽 경계에 건지산·수정산, 남쪽 경계에 구봉산(九峰山, 465m)·경수산(鏡水山, 258m) 등 비교적 많은 산지가 병풍을 두른 것처럼 면 전체를 에워싸고 있다. 남쪽을 관류하는 한천(漢川 : 일명 목신천)과 동류하는 청미천유역에 곡저평야가 펼쳐져 있다. 밭농사보다 논농사가 압도적으로 우세한 시의 대표적인 농업지역으로 넓은 경지면적에다 추곡 수매실적도 많은 편이다.

주요 농산물은 미곡을 비롯하여, 그 밖에 녹두 등 두류도 경작되며 채소와 과수농업도 활발하다. 축산업도 활발하여 한우·젖소·돼지·닭·산양·사슴·오리 등의 가축이 사육된다. 오랜 전통을 갖고 있는 도자기 산업을 필두로 양조와 금속 및 전기관련 제조업체가 분포한다. 매우 빠르게 산업화·도시화되어 가는 다른 지역과는 달리 복합영농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곳이다.

교통은 17번 국도가 동쪽에서 북쪽 방향으로 이어지고 392번 지방도가 중앙에서 남단으로 종단하며 304번 지방도가 동서를 가로지른다. 이 밖에도 4·15·17번 시도가 사방을 잇는 등 도로망을 갖추고 있다.

문화유적은 사암리에 선돌, 문촌리에 문수산마애보살상·정영대가옥(鄭榮大家屋), 사암리에 선돌, 미평리에 약사여래입상, 목신리에 석조여래입상, 맹리에 지석묘가 있다. 이 밖에도 두창리에 효자정문·삼층석탑·고분, 독성리에 열녀정문 등이 있다. 또한, 죽릉리에 극락사(極樂寺), 학일리에 장경사(長庚寺) 등도 있다.

고당(高塘)·사암(沙巖)·좌항(佐恒)·맹(孟)·미평(彌坪)·가재월(加在月)·두창(杜倉)·독성(篤城)·죽릉(竹陵)·목신(木新)·학일(學日)·문촌(文村) 등 12개 리가 있다.

⑦이동면(二東面)

구의 중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75.66㎢, 인구 2만 292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송전리이다.

본래 용인군 지역으로 상동면이라 하여 원촌·천동·서동 등 5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하동면(下東面) 전체와 남촌면(南村面) 방목동(放木洞)을 병합하여 상동과 하동의 이름을 따서 이동면이 되어 9개 리로 개편되었고, 1996년 시로 승격될 때 편입되었다. 2005년 10월 31일 구청의 신설로 처인구에 편입되었다.

지세는 중서부에 시궁산(時宮山, 515m)을 모산으로 한 산간지대가 넓게 분포한다. 중앙에 삼봉산(三峰山, 415m), 북쪽에 함박산(函朴山, 350m), 북서쪽 끝에 부아산, 서쪽에 함봉산·달봉산(達峰山, 203m) 등이 있다.

남부의 이동(二東)저수지로 흘러드는 진위천유역과 중북부의 용덕저수지로 합류하는 송전천(松田川) 주변에 곡저평야가 전개되어 있다. 경지율이 높은 편은 아니지만 크고 작은 저수지를 통해 관개용수를 공급받으며, 밭농사보다 논농사가 다소 우세한 지역이다.

주요 농산물은 미곡을 비롯하여 두류의 산출량이 많다. 축산업으로 한우·젖소·돼지·닭·오리 등을 사육하는 축산농가가 많다. 오랜 연원을 갖고 있는 도자기 관련 산업을 비롯하여 섬유·가구·화학·합성수지·전기전자 관련 제조업체가 있다.

도로의 45번 국도가 남북으로 길게 이어진 면의 중앙을 종단하고, 이 밖에 2·6번 시도가 45번 국도와 곳곳에서 연결된다. 문화유적은 서리에 고려백자요지, 어비리에 동도사(東道寺)·삼층석탑, 천리에 석조여래입상, 묵리에 용덕사(龍德寺), 천리에 석조여래입상이 있다.

송전(松田)·어비(魚肥)·묘봉(卯峰)·화산(華山)·시미(時美)·덕성(德成)·묵(墨)·천(泉)·서(西) 등 9개 리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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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시사』(용인시·용인문화원, 2005)
『지방행정구역요람』(행정자치부, 2000)
『한국지명총람』(한글학회, 1986)
『내고장의 얼』(이인영 편, 용인문화원, 1986)
『한국관광자원총람』(한국관광공사, 1985)
『경기연감』(경인일보사, 1985)
『한국지지』(건설부국립지리원, 1984)
『내고장 용인』(이인영, 문학사상사, 1984)
『한국지명요람』(건설부국립지리원, 1982)
『지방행정지명사』(내무부, 1982)
『경기도사』(경기도사편찬위원회, 1979)
용인시(www.yongins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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