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만(衛滿)의 손자이다. 위만이 즉위한 뒤, 고조선은 우세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많은 지역을 정복하면서 세력이 더욱 강대해졌다. 우거왕은 이것을 배경으로 중간무역의 이익을 독점하기 위해 한강 이남에 있는 진국(辰國) 등 여러 나라가 한(漢)나라와 직접 교통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은 고조선이 당시 몽고에서 만주로 뻗어오던 흉노와 연결될 것을 두려워하고 있던 한나라 정부를 더욱 자극시켜 고조선과 한나라는 정치적으로 서로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대립관계를 해소하려는 정치적 교섭이 실패로 돌아가자, 한무제(漢武帝)는 서기전 109년 마침내 무력으로 침략해왔다. 고조선은 이에 대항해 1년을 잘 싸웠으나 마침내 수도인 왕검성(王儉城)이 적군에게 포위되면서 고조선 내부는 화전 양파로 분열되었다. 주화파(主和派)는 항복을 건의했지만 우거왕이 이를 거부하자 주화파의 일부는 적군에게 투항하였다. 주화파의 한 사람인 니계상(尼谿相) 삼(參)은 서기전 108년 6월 자객을 보내 우거왕을 살해하였다. 그 뒤, 대신 성기(成己)가 최후까지 저항을 꾀했으나 마침내 왕검성은 함락되고 고조선은 멸망하였다. 이렇게 하여 우거왕은 고조선 또는 위만조선의 마지막 왕이 되었다. '우거(右渠)'는 본래 '지배자'를 뜻하는 순 우리말로, '거수(渠帥)'와 같은 의미를 가진 단어인데, 이것이 고조선 마지막 왕의 이름으로 기록된 것이다.
우거왕이 끈기있게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위씨조선이 한나라와 대항할 만한 금속문명의 혜택을 충분히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경하기만 했던 대외정책과 지배층 내부의 분열이 고조선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