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정권 이후부터 신분질서의 해이와 가혹한 지방관의 탐학으로 빈곤에 시달리던 농민·천민들이 봉기하게 되었는데, 우방전의 난도 그 중의 하나였다. 1174년에 일어난 조위총(趙位寵)의 난의 잔당들은 조위총이 주살된 뒤에도 노략질을 계속하였다.
1179년 서북면지병마사(西北面知兵馬事) 이부(李富)는 반란적이 식량부족인 것을 알고 그들에게 식량을 준다고 속여 성 안으로 유인, 400명을 잡아죽였다. 그러자 함정에 빠진 것을 안 적수(賊帥) 우방전이 다시 무리를 모아 노략질을 감행하였다.
이부는 여러 성의 군사를 동원하여 공격하였으나 오히려 안북도호판관(安北道護判官) 함수산(咸壽山)이 전사하였다. 우방전의 난은 병마사에 의하여 진압되었으나, 조위총의 난과 같은 연결선상에서 일어난 서북인의 봉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