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성 이천기 일가 묘 출토복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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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성 이천기 일가묘 출토 복식
학성 이천기 일가묘 출토 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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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1969년 울산광역시 신정동 판교(板橋)의 학성이씨(鶴城李氏) 일가 묘에서 출토된 17세기 유물 10점.
정의
1969년 울산광역시 신정동 판교(板橋)의 학성이씨(鶴城李氏) 일가 묘에서 출토된 17세기 유물 10점.
개설

1979년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학성 이천기 일가 묘 출토복식은 1969년에 이천기(李天機: 1610∼1666) 묘와 그의 부인 흥려박씨(興麗朴氏: 1605∼1672)의 묘, 그리고 이천기의 셋째 아들인 이지영(李之英: 1642∼1666)과 그의 부인 평해황씨(平海黃氏: 1637∼1718)의 부부 합장묘에서 출토된 10점의 일괄유물이다. 1979년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울산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이천기의 묘에서는 광다회대(廣多繪帶) 1점, 솜소모자(小帽子: 면포, 명주) 2점이 출토되었으며 이천기의 부인 흥려박씨의 묘에서는 무명 솜장옷 1점, 옷감 1점, 면포 홑치마 1점 등, 3점이 출토되었다. 그리고 이지영과 그의 부인 평해황씨의 묘에서는 난봉화문단 겹장옷 1점, 명주 솜누비 치마 1점, 면포 솜버선 1켤레, 옷감 1점 등 모두 10점이 수습되었다.

2004년 2월 전문가들의 조사 자료와 문중에서 제시한 묘주에 대한 자료를 검토하여 2004년 6월 18일에 문화재명 ‘울산이휴정소장출토복식’을 ‘학성이천기일가묘출토복식(鶴城李天機一家墓出土服飾)’으로 변경하였으며 묘주의 이름과 일부 유물 명칭도 수정하였다. 그리고 흥려박씨의 묘에서 출토되었던 면포 홑치마 1점을 추가 지정하였다.

내용

장옷[長衣]은 지정 당시 ‘직령포(直領袍)’로 명명되었던 것인데 그 동안의 연구 성과에 근거하여 2004년 6월에 ‘장옷’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장옷은 조선시대 여성들이 착용하였던 대표적인 포(袍) 종류이다. 18세기 후반부터 장옷은 머리에 덮어 얼굴을 가리는 용도로 사용되었으나 그 이전 시기에는 포(袍)로 착용되었다. 좌우 모두 섶 안으로 들여달린 목판깃이 달렸으며 좌우 양 섶이 두 조각으로 이루어진 이중섶이다. 소매는 직배래의 통수(筒袖)이며 겨드랑이에는 작은 사각접음 무를 달았다. 수구에는 다른 색의 옷감을 붙여 그 끝을 접어 입었다.

장옷 1점은 이천기의 부인인 흥려박씨의 묘에서 수습된 짙은 아청색 무명 솜장옷이다. 뒷길이가 124㎝, 뒤품은 57㎝, 진동은 32㎝, 화장은 90㎝이며 깃에는 넓은 동정이 달려 있다. 다른 1점은 이천기의 아들인 이지영의 부인 평해황씨의 묘에서 수습된 ‘난봉화문단(鸞鳳花紋段) 겹장옷’이다. 본래는 ‘운문단직령포’로 명명되었으나 2004년 조사에서 5매수자직의 난봉화문단인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옷의 명칭도 장옷으로 수정되었다. 본래는 겹옷이었으나 현재는 겉감만 남아 있으며 특히 좌우의 소매 끝부분도 소실된 상태이다. 뒷길이는 122.5㎝, 뒤품은 52㎝, 진동은 29㎝이고 현재 상태에서 화장은 55㎝이다. 겉섶 끝부분 등에도 훼손이 심한 상태이다.

치마[赤亇]는 저고리와 더불어 여성의 기본적인 옷이다. 여러 폭을 이어 만든 직사각형 자락의 윗부분에 주름을 잡아 허리말기에 고정시키고 끈을 다는데 17세기에는 저고리의 길이가 길어서 치마를 허리에 둘러 착용하였기 때문에 그 길이가 짧다. 모두 2점의 치마가 지정되었는데 1점은 2004년에 추가 지정된 흥려박씨 묘의 ‘무명홑치마’이다. 치마 길이는 83㎝이며 치마폭은 9폭으로 전체 너비가 357㎝이다. 허리말기의 너비는 4㎝이고 길이는 88㎝이다. 바느질은 성근 편이며 현재의 색상은 소색이지만 본래의 색상은 알 수 없다. 다른 1점은 평해황씨 묘에서 수습된 ‘명주솜누비치마’이다. 본래는 ‘누비치마’로 지정되었으나 유물명명 원칙에 따라 명칭이 수정되었다. 안감으로 무명[綿布]을 사용하였으며 1.5㎝ 정도의 간격으로 누볐다. 허리 말기 부분이 소실되어 현재는 치맛자락만 남아있는데 길이는 86∼89㎝이고 치마폭은 10폭으로 전체 310㎝이다. 치마 안쪽의 좌우 선단과 도련에 1.5㎝ 너비의 선 장식을 둘렀다.

광다회대(廣多繪帶)는 ‘광다회(廣多繪)’라고도 불리어졌던 조선시대 남자들의 실띠[絲帶]이다. 관복(官服)이나 사복(私服)에 사용된 넙적한 형태의 띠이다. 이천기의 묘에서 수습된 것으로 지정 당시에는 ‘동다회(童多繪)’로 명명되었지만 2004년에 ‘광다회대’로 수정하였다. 수습 당시 심하게 훼손된 상태였으나 1997년 보수 후 원형에 가까운 모습을 되찾았다. 띠의 너비는 3㎝이며 본래 길이는 알 수 없으나 보수 후 양 끝에 달린 10㎝ 길이의 술을 포함하여 221㎝가 되었다. 술 윗부분에 둘려진 망수(網繡) 장식 부분의 길이는 11.5㎝인데 망의 구멍 사이로 금색 물질이 보인다.

솜소모자(小帽子)는 이천기의 묘에서 2점이 수습되었다. 아청색 고운 면포와 명주로 만들어진 것인데 머리 부분에는 삼각형 6조각을 이어서 만들고 그 아래에 직사각형 두 조각을 이은 넓은 띠 조각을 둘렀다. 그 구조는 1993년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진주하씨(1652년경) 묘 소모자의 구조와 일치한다. 소모자 유물 2점의 크기는 동일한데 머리 둘레가 68㎝이고 높이는 25㎝이다. 그리고 면포 소모자에는 모자의 하단 테 부분에만 솜이 확인되고 모정(帽頂) 부분은 겉감만 남은 상태이며 명주 소모자는 전체적으로 솜이 두텁게 들어있으나 안감은 없는 상태이다.

그 외에 이천기의 부인 흥려박씨의 묘에서 수습된 ‘옷감’ 1점이 있다. 이는 본래 ‘명주(明紬) 목도리’로 명명되었던 유물이지만 ‘옷감’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관 안에 발랐던 관내의(棺內衣)의 일부분으로 추정된다. 초(綃)라는 얇은 평직물(平織物)인데 폭은 39㎝이고 길이는 195㎝이다.

또한 이지영 부부의 합장묘에서 수습된 면포 솜버선 1켤레가 있다. 발길이는 24㎝이고 높이는 27㎝이며 버선목의 너비는 17㎝이다. 버선의 수눅 안쪽에 12㎝의 창구멍이 바느질되지 않은 상태로 있으며 버선 한 짝에는 옷감을 덧대어 기운 부분이 있다.

의의와 평가

울산 지역의 17세기 중반에서 18세기 초에 걸친 조선시대 한 문중의 남녀 일상복이라는 점에서 복식사적 가치가 있다. 또한 일반 소모자의 구성법과는 다른, 소모자 구성법이 주목되며 광다회대의 경우, 망수 부분이 다른 유물보다 길이가 길고 장식적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참고문헌

『문화재대관 중요민속자료2 복식자수편』(문화재청, 2006)
「중요민속자료 지정명칭 및 유물명칭 변경 사례연구」(이은주·박성실, 『복식』55·7,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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