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삼국토기는 서기전 1세기부터 서기 300년까지 약 400년간에 해당되는 원삼국시대에 우리나라 남부지방에서 생산되고 사용된 일군의 토기이다. 양질의 점토를 채토해서 사용하였고, 그릇의 성형에 숙련된 타날기법과 물레질법을 적용할 수 있게 되었다. 토기 가마의 축조와 운영에도 수준 높은 기술을 응용하였다. 지역에 따라 경질무문토기, 타날문토기, 와질토기, 적색연질토기, 그리고 말기의 도질토기 등이 다양한 유형의 토기가 제작되었다. 김해패총에서 발굴된 도질토기 단경호(短頸壺)가 대표적인 유물이다.
원삼국토기의 실체에 대한 인식이 정립되기 이전까지는 일제강점기에 발굴된 김해패총의 토기를 이 시대의 표지유물로 삼고 아예 원삼국토기를 김해식토기(金海式土器)라고 불렀다. 김해패총에서는 왕망(王莽)의 신(新: 8∼24)나라 화폐인 화천(貨泉)이 출토된 것으로도 유명한데 이 화폐의 연대가 유적의 연대에 적용되어 원삼국시대를 대표하는 유적이 된 것이다. 그리고 김해식토기를 대표하는 유물은 이 유적에서 많이 출토된 타날승문(打捺繩文)이 있는 도질토기(陶質土器) 단경호(短頸壺)였다.
1980년대 들어 영남지역의 고고학자들은 이 시대를 대표하는 토기는 토광묘(土壙墓)에서 출토되는 와질토기(瓦質土器)이며 도질토기는 원삼국시대 말기에 등장한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이러한 주장은 원삼국토기의 실체에 대한 생각을 근본적으로 바꾸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호남지방과 한강유역, 영동지방의 취락유적에서는 원삼국시대 대부분의 기간 동안 이전 시대의 전통인 경질무문토기(硬質無文土器)가 사용되고 타날문단경호(打捺文短頸壺)가 동반될 뿐이라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 지역 원삼국시대를 대표하는 토기는 와질토기가 아니라 경질무문토기와 타날문토기라는 인식이 생겨났다.
최근 원삼국시대에는 초기철기시대와는 달리 제 지역과 시기, 그리고 유적의 성격에 따라 다양한 성격의 토기가 사용되었던 시대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토기의 생산과 사용의 측면에서 원삼국시대는 지역과 시기에 따라 경질무문토기, 타날문토기, 와질토기, 적색연질토기(赤色軟質土器), 그리고 말기의 도질토기 등이 서로 비중을 달리하여 사용되었던 시대였다. 청동기시대의 무문토기는 점토의 선별이나 성형 및 소성의 기술이 원시적인 수준이었고, 제대로 갖추어진 공방(工房)에서 숙련된 기술을 익힌 전문도공이 그릇을 만드는 생산시스템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원삼국시대에 접어들면 제작기술과 조업방식에서 혁신적인 변화가 시작된다. 이 시기부터 양질의 점토를 채토해서 사용하였고, 그릇의 성형에 숙련된 타날기법(打捺技法)과 물레질법을 적용할 수 있게 되었으며, 토기 가마의 축조와 운영에도 수준 높은 기술이 응용되기에 이르렀다. 점차 숙련된 전문도공이 나타나 토기생산을 전담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발전을 거쳐 삼국의 고대국가에서는 표준화된 형태로 대량 생산된 회색경질 도기(陶器)의 출현을 볼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원삼국시대는 토기제작의 중요한 기술혁신이 이루어졌고 생산체계의 커다란 변동이 진행된 시대였다.
원삼국시대란 삼국이 영역국가로 정립되기 전 원초적 형태의 삼국시대라는 의미이다. 당시 한반도 일대의 정황을 보면 서북지방에 한나라가 설치한 군현인 낙랑(樂浪)이 자리 잡고 있었고 북쪽에서는 고구려가 일찍부터 성장하여 초기국가 단계에 도달해 있었다. 이에 비해 한반도 중부 이남은 정치적인 발전이 다소 늦어 마한, 진한, 변한으로 구분되는 세 지역에는 약 100여개의 작은 나라가 분립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 시대는 삼국의 원초적인 상태가 형성되기는 하였으나 삼국의 정립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과도기적인 시대인 것이다.
동아시아 전체로 보면 이 원삼국시대 개시기는 중요한 역사적 전환기에 해당된다. 중국은 전국시대(戰國時代) 혼란기의 종지부를 찍고 진 · 한제국(秦漢帝國)의 시대가 열려 거대 문명국가로서 주변지역에 정치, 경제, 이념적 영향력을 강력하게 행사하기 시작한다. 이에 비해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비롯한 주변사회는 이 시기부터 비로소 문명지역과 직접 접촉하면서 사회문화 발전의 동력을 얻게 된다.
원삼국시대에 시작된 새로운 토기 제작기술의 기원은 전국시대 요동지역까지 파급된 중원의 회도(灰陶)기술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신기술에는 크게 양질의 점토 사용, 물레질과 타날기법을 응용한 성형, 그리고 밀폐된 가마 안에서의 환원소성 등 세 가지 요소를 포함한다. 이러한 신기술의 확산과 수용의 과정은 외부적인 요인과 조건으로만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신기술의 수용을 가능하게 했던 토착사회 내부의 여건이 맞물려 진행된 결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첫째, 외부적인 조건으로 중원문명의 확장과 그에 따른 문명과 주변사회의 상호작용을 들 수 있다. 전국시대 가장 동북방에 자리 잡고 있던 연(燕)나라가 요동지방까지 세력을 확장한 것은 서기전 4∼3세기 전후인데 이때 중원의 철기문화도 이 지역으로 확산되어 들어 왔다. 이 철기문화 속에는 철기 생산기술과 함께 회도 제작기술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후 서기전 108년 한(漢) 무제(武帝)가 설치한 낙랑군이 한반도 서북부를 중심으로 주변 토착세력을 아우르며 정치 · 사회 · 문화적 상호작용의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된다. 원삼국시대 초기에 회도 제작의 신기술이 한반도 남부까지 전달될 수 있었던 것은 낙랑과 같은 문명의 거점과 직접적인 상호작용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둘째, 내부 조건으로 한반도 제 지역의 자체적인 사회 · 문화적 변화와 발전의 누적을 생각해야 한다. 전문도공이 정치한 기술로 성형하고 가마에서 소성한 고급 정제토기는 그것을 필요로 하는 상위계층이 그러한 기술을 지닌 도공을 생산에 전업하도록 지원해주었기에 나타날 수 있었다. 물레질법과 같은 익히기 힘든 성형기술이 도공들 사이에 널리 보급되어 대량 생산의 기반이 조성된 것도 사회가 복잡하게 되어 토기의 용도가 확장되고 그 수요가 늘어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원삼국시대 초기 남한지역의 무문토기 제작자들은 한편으로는 무문토기 기술체계를 그대로 이어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회도의 기술체계를 받아들여 새로운 유형의 토기유물군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원삼국시대 초기의 토기유물군은 기술체계의 차이에 따라 종전의 무문토기군과 새로운 회색토기군으로 나뉘지만 회도의 기술이 무문토기 기종에 적용되면서 새로운 토기유물군이 나타나게 되며 각각의 토기유물군은 나름대로의 독특한 기종구성(器種構成)을 갖추게 된다.
원삼국시대 초기부터 새로운 기술요소가 적용되는 방식에서 차이가 나는데 첫째로는, 타날문원저단경호(打捺文圓低短頸壺)처럼 새로운 기종에 승석문타날(繩蓆文打捺), 환원소성 및 회전물손질 등과 같은 새로운 기술요소 전체가 한 세트로 적용되는 방식이 있다. 둘째로는 파수부장경호(把手附長頸壺)나 주머니호, 또는 옹(甕)이나 발(鉢)과 같은 종전의 무문토기 기종에 새로운 기술요소의 일부가 적용되어 새로운 형태의 토기로 변해가는 과정이 있다.
무문토기 기술과 회도 기술이 융합되는 과정을 거쳐 원삼국시대 후기에는 새로운 토기제작의 기술체계로 정비되는 한편 토기제작도 전문화되어 도공들의 숙련도도 높아지게 된다. 이러한 기술혁신의 과정을 통해 원삼국시대 후기의 토기 중 타날문원저단경호는 이전보다는 훨씬 숙련된 제작행위를 통해 그릇 두께도 고르고, 균형 잡힌 구형의 몸통에 그릇 아가리도 회전물손질로 깔끔하게 마무리된다. 그리하여 원삼국시대 말기가 되면 한정된 공방에서 도질토기인 타날단경호를 생산하기 시작한다. 이 도질토기는 한마디로 매우 숙련된 기술행위를 익힌 전문도공에 의해 대량 생산된 표준화된 제품이었다.
옹이나 발과 같은 일상생활용 토기는 지역에 따라 기술적인 변화의 진행이 다르게 나타난다. 한강 중 · 상류 지역과 영동지역에서는 원삼국시대 이후 삼국시대까지도 타날문단경호와 대옹을 제외한 일상용 토기의 대부분은 무문토기적인 기술로 생산된다. 호서와 호남 등 마한지역에서도 일상용 토기는 무문토기였지만 원삼국시대 말기쯤 되면 타날기법이나 물레질법 등이 옹이나 발에 적용되기 시작한다.
진 · 변한지역은 생활용 토기 제작에서 무문토기 기술요소가 일찍부터 소멸하고 타날기법이나 물레질법 등이 채용되었는데 지역에 따라 제작기술에 큰 차이를 보인다. 이를테면 사로국(斯盧國)에서는 일찍부터 옹과 발형토기(鉢形土器)가 타날기법으로 성형되고 환원소성 하였기에 회색을 띤다. 그러나 아주 가까운 이웃인데도 불구하고 김해의 구야국(狗倻國)에서는 평행타날을 하고 그릇 표면을 목판으로 고르는 기법이 적용되며 산화염으로 소성하여 적색토기가 된다.
원삼국시대에 들어서 실생활용 토기는 별로 바뀌지 않는다. 마한과 예(濊), 그리고 진 · 변한, 모든 지역에서 원삼국시대 생활용토기는 무문토기 기종을 그대로 계승하였고 새로 생긴 기종은 많지 않다. 취락이나 패총에서 발견되는 일상용 토기의 종류는 무문토기의 기종에도 있던 대 · 중 · 소형의 옹과 발형토기, 그리고 완(宛) 등이다. 원삼국시대에 새로 추가되는 기종은 대 · 소형 원저단경호와 시루 등이며 이러한 일상용 토기의 양상은 남한 어느 지역이나 비슷한 편이다.
그러나 분묘에 부장하기 위한 토기의 종류는 시기와 지역에 따라 변화가 크다. 한강유역과 영동지역은 원삼국시대 분묘라고 할 만한 것이 없어서 따로 부장용 토기가 존재했는지도 불분명하다. 마한지역의 경우 주구토광묘(周溝土壙墓), 분구묘(墳丘墓)가 축조되면서 여기에 부장된 토기를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지역의 원삼국시대 후기 분묘에서 발견되는 부장용 토기는 기종구성이 무척 단순하여 타날문단경호와 발형토기, 2종류 밖에 없다.
진한과 변한지역, 그 중에도 경주를 중심으로 한 지역의 원삼국시대 후기 지배자 분묘에는 가장 다양한 종류의 토기들이 부장되어 있다. 와질토기 기종으로 되어 있는 부장용 토기는 음식을 차리는데 쓰는 그릇만이 아니라 음식을 저장하는데 쓰는 그릇까지 묻어주었던 것 같다. 이 지역 원삼국시대 전기 목관묘(木棺墓)에는 파수부장경호와 주머니호, 타날문단경호 등이 부장되지만 후기의 목곽묘(木槨墓)에는 대부장경호(臺附長頸壺), 노형토기(爐形土器), 단경호, 소옹(小甕), 고배(高杯), 신선로형토기, 컵형토기, 완, 오리모양토기〔鴨形土器〕등 실로 다양한 와질토기의 기종이 부장품으로 사용되었다.
이 모든 와질토기 기종은 공이 많이 드는 마연법으로 표면을 다듬었으며 암문(暗文)이라고 하는 은은한 장식적인 효과도 내었다. 목곽묘 출토 와질토기 제작에는 특히 전문적이고 숙련된 마연기술이 동원되었는데 당시에도 와질토기 제작의 전문도공이 있었던 것 같다.
원삼국시대에는 지역에 따라 토기의 유형이 달랐고 같은 지역에서도 서로 다른 유형의 토기가 공존하였다. 토기의 유형에 따라 기술체계가 전혀 다르기 때문에 질감이나 형태가 서로 달랐고 그릇의 종류나 용도도 서로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유형별로 원삼국토기를 구분해 보면 와질토기, 타날문토기, 도질토기, 적색연질토기 등이 있다.
처음으로 김해식토기의 개념에 문제를 제기한 영남지방의 고고학자들은 이 지역 분묘유적에 발견되는 회색의 연질토기를 와질토기라고 이름붙이고 고온으로 소성되어 회청색에 자연유가 흐르는 도질토기가 등장하기 전에 유행했던 토기 유형이라고 주장했다. 와질토기 중에는 일상생활에서 사용되는 것도 있고 마연법으로 만들지만 타날법과 물레질법에 의해 제작된 것도 많다. 그러나 와질토기 중에는 그릇의 형태나 질감에서부터 실용적이라고 보기 어려운 토기도 많은데 이런 토기는 오직 변 · 진한 특히 진한지역의 무덤에서만 많이 나온다.
도질토기에 앞서 존속했던 와질토기가 원삼국시대를 대표하는 토기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도 많지만 와질토기는 그 용도나 분포지역에서 한정된 토기 유형인 것은 사실이다. 일부 연구자들은 원삼국시대를 대표하는 토기를 와질토기 대신 타날문토기라고 여기는 경우도 있다. 우리나라 전역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토기는 타날하여 둥근 몸통으로 만들고 짧은 목을 붙인 타날문단경호이다. 영남지역에서는 목관묘로부터 승석문단경호가 처음 등장하는데 원삼국시대 후기의 목곽묘에서 격자타날(格子打捺)된 단경호가 나올 때까지 승석문이 계속된다. 중서부지방의 주구토광묘나 분구묘에서는 격자타날문의 단경호가 많이 나오는 편이다.
원삼국시대 거의 대부분의 기간 동안 일상용 토기는 무문토기 기술로 제작된다. 해남 군곡리 패총에서는 중국 화폐인 화천이 출토되어 유적이 형성된 연대를 짐작하게 하는데 패총에 퇴적된 유물을 통해 당시 일상생활용 토기의 양상을 알 수 있다. 이 패총에서 나오는 옹과 발, 그리고 시루 등의 생활용 토기는 원삼국시대 꽤 늦은 시기까지 타날기법과 물레질법이 적용되지 않고 바닥은 여전히 무문토기처럼 납작바닥 형태이다. 그릇 표면은 마연과 목판긁기로 다듬었고 소성은 산화소성이어서 적갈색을 띤다. 경질무문토기라고 부르는 이유는 태토와 성형 및 정면기법 소성 분위기도 무문토기 그대로지만 다만 온도를 높여 소성했기 때문에 단단해져서 그렇게 부르는 것 같다.
강원도 춘천의 중도 유적에서는 회색의 타날문단경호와 고구려의 끌머리형〔鑿頭式〕철촉이 출토되었는데, 여기서 나온 생활용 토기들은 거의 모두 무문토기 기술로 제작된 것이었다. 겉모습으로 보면 무문토기 그대로이기 때문에 이 토기군에는 중도식토기(中島式土器) 혹은 중도식무문토기(中島式無文土器)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래서 중도식무문토기라고 하면 원삼국시대 토기로 알고 있지만 함께 나온 고구려 철촉의 연대를 4세기 이전으로 올려 보기는 어렵기에 이 지역은 무문토기 전통이 원삼국시대 이후까지 계속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가마 안의 온도를 극대화하여 표면에 자연유가 흐를 정도로 단단하게 소성한 토기로 진 · 변한 지역에서 와질토기가 발전하여 등장한 유형이다. 초기 도질토기를 살펴보면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이 있다. 첫째, 3세기 후반에 등장하는 최초의 도질토기는 아주 한정된 지역, 즉 김해와 함안에서만 볼 수 있다. 둘째, 최초의 도질토기에는 다른 기종이 없고 단경호류 즉, 소형원저단경호나 타날문단경호만 있다. 셋째로는 불에 잘 견디는 점토로 고온 소성에 성공한 것이 도질토기의 중요한 특징이기도 하지만 도질토기는 성형기술의 혁신을 통해 탄생한 토기유형이다.
빠른 물레질로 그릇의 3/4을 만들어 내고 규칙적이고 기계적인 타날 동작으로 그릇을 완성하는 도질토기 성형기술은 대량생산의 측면에서 무엇보다 중요하다. 도질토기는 한마디로 낙동강 하류지역의 도공이 물 담는 항아리를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과정에서 등장하게 된 토기의 유형이라 할 수 있다. 아무튼 원삼국시대 말기에 우리나라 동남부에서 생겨난 도질토기 생산체계는 삼국시대에 접어들면 모든 토기생산체계를 흡수하여 대규모 공방으로 발전하게 된다.
적색연질토기란 산화염으로 소성하여 적색이나 갈색을 띠며 무문토기의 기종이었던 옹형토기(甕形土器)와 발형토기가 이러한 질로 제작된다. 그러나 무문토기에 비해 원료점토에 모래알갱이가 그리 많지 않아서 태토가 고운 편이고 타날기법으로 1차 성형한 뒤 물레질로 다듬었다는 점에서 무문토기의 성형기법과는 판이하다. 그리고 옹형토기는 적색연질토기로 바뀌면서 바닥이 둥근 바닥으로 변한다.
무문토기 전통이 원삼국시대까지 지속되어 왔는데 일정 시점이 되면 무문토기 기종에도 발전된 성형기법인 타날기법과 물레질법이 채용된다. 이러한 과정에 탄생한 토기유형이 적색연질토기인 셈이다. 적색연질토기는 낙동강 하류 변한지역에서 가장 일찍 나타나는데 비해 한강 상류지역이나 영동지방은 매우 늦은 시기까지 경질무문토기가 남아 있다가 적색연질토기로 바뀌었다.
원삼국시대는 다른 어느 시대에 비해 매우 역동적인 시대였다. 청동기시대와 초기철기시대의 초보적인 수장사회는 이 시대를 거쳐 삼국시대의 초기국가로 발전한다. 이처럼 사회문화의 변동이 빠르게 진행되었던 것은 이 시대 초기에 문명지역과 직접적인 접촉을 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철기문화를 빠르게 수용했기 때문이었다. 이 새로운 철기문화 속에는 회도제작기술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신제도기술(新製陶技術)은 한국의 토기문화에 여러 가지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다. 첫째, 초기철기시대까지 우리나라의 토기는 테라코타의 수준에 머물렀지만 이 시대를 기점으로 회색 도기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으며 이후 성형 · 소성기술의 축적을 거쳐 통일신라시대가 되면 자기의 시대가 개막되었다.
둘째, 이 시대를 통해 토기문화의 다양성이 크게 확대 되었다. 초기철기시대까지 전국에는 점토대토기군 일색이었고, 그릇의 종류나 제작기술의 변이도 극히 단순하였다. 그러나 원삼국시대가 되면 다양한 그릇의 종류와 제작기술의 유형으로 나뉘고 시기와 지역마다의 서로 상이한 사회문화적 조건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토기가 제작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셋째로는 토기의 생산 · 분배 시스템의 발전의 측면에서 이 시대 토기문화를 이해해야 한다. 신제도기술을 수용했던 원삼국시대의 일부 토기제작자들은 전문화의 수준을 높이고 자신의 제작소를 대량생산의 공방으로 발전시켰다. 이러한 발전을 거쳐 삼국시대가 되면 여러 명의 전문 공인이 함께 조업하는 고대국가의 관영수공업체제로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