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광렬 ()

유광렬
유광렬
언론·방송
인물
일제강점기 황성신문을 창간하고 만민공동회 간부를 지낸 언론인. 친일반민족행위자.
이칭
이칭
종석(種石)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99년(고종 36) 6월 27일
사망 연도
1981년 11월 3일
본관
문화(文化)
출생지
경기도 파주
정의
일제강점기 황성신문을 창간하고 만민공동회 간부를 지낸 언론인. 친일반민족행위자.
개설

호는 종석.

생애 및 활동사항

1913년 경기도 고양군 일산에서 면서기로 일했다. 1919년 동인지 『신청년』과 잡지 『녹성』 발간에 참여하였고, 매일신보사에 입사하였다가 한 달만에 그만두었으며, 『만주일보』 서울지국에 입사하였다. 그 이듬 해 동아일보사 사원으로 입사한 뒤 1923년까지 사회부 기자·상해특파원·사회부장을 지냈다.

1924년 조선일보사 사회부장, 1926년 시대일보사 사회부장, 중외일보사 편집국 차장이 되었다. 1927년 다시 조선일보사로 옮겨 1931년까지 사회부장·편집인·정리부장을 지냈으며, 1931년 12월부터 중앙일보사 지방부장으로 근무하다가 이듬 해 4월 퇴직하였다. 1930년 조선농민사에 반대하는 일부 비천도교인 이사와 천도교 청년들이 임시대회를 소집하고자 결성한 준비위원회 위원으로 선정되었으며, 조선물산장려회 이사로도 피선된 후 선전위원 등 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2년 박일형·이몽과 함께 문필가협회 발기인이 되었으며, 1934년 과학의 날 실행위원이 되었다. 같은 해 매일신보사로 가서 1940년까지 편집국장, 동경특파원을 지냈다. 일제 말기인 1941년부터 신문과 잡지에 일제의 식민통치에 협력하고 침략전쟁을 선전·선동하는 글을 지속적으로 발표하였다.

1941년 임전대책협력회에 가담하였고, ‘황도정신의 선양’과 ‘전시체제하 국민생활의 쇄신’ 을 강령으로 삼고 설립된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인과 평의원을 맡았다. 1944년 국민동원총진회 상무이사, 1945년 6월 친일단체인 조선언론보국회 이사를 맡았다.

해방 이후 사망할 때까지 『동아일보』·『조선일보』·『한국일보』의 논설위원을 맡았다. 1946년 『대한독립신문』이 속간될 때 편집국장이 되었고, 1949년 국회의장 신익희의 비서실장으로 일했다. 1950년 국회의원 선거, 1954년 총선, 1956년 고양군 민의원 보선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60년 고양군에서 민의원에 당선되었으나 그 이듬 해 5·16군사정변으로 인해 직위를 잃었다. 1962년 8월 대한민국장, 1964년 10월 공보부 제정 방송문화상을 받았다. 1967년 성곡언론문화재 이사장, 『언론계』 고문을 맡았다. 1970년 명예문학박사 학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을 받았다. 1973년 문화공보부의 민족기록사화 추진위원을 맡았고, 그 이듬 해 국학개발위원회와 한국민족문화고증학회를 발족하여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80년 새싹회로부터 소파상을 수상하였다.

참고문헌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www.koreanhistory.or.kr)
관련 미디어 (1)
집필자
조미은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