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만수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때, 대한애국청년당을 조직하여 부민관 투탄 의거를 계획한 독립운동가.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24년경
사망 연도
1975년
본관
진주(晉州)
출생지
경기도 안성
관련 사건
부민관투탄의거
정의
일제강점기 때, 대한애국청년당을 조직하여 부민관 투탄 의거를 계획한 독립운동가.
개설

경기도 안성 출신.

생애 및 활동사항

1943년에 강제수용되어 있던 일본 가와자키[川崎]의 일본강관주식회사(日本鋼管株式會社)에서 훈련공에 대한 민족적 차별에 심한 분노를 느꼈다. 이에 조문기(趙文紀) 등과 주동해 1,000여 명의 한국인들이 3일간 파업 끝에 요코하마[橫濱] 헌병대와 가와자키경찰서 80여 명에게 포위되어 회사의 식당 내에서 항쟁하였다.

귀국한 뒤 조문기·강윤국(康潤國)·우동학(禹東學)·권준(權俊) 등과 함께 서울 관수동의 자기 집에서 비밀결사인 대한애국청년당(大韓愛國靑年黨)을 조직하였다.

1945년 7월 24일 서울 부민관(府民館)에서 조선총독을 비롯한 조선군사령관, 친일파의 거두 박춘금(朴春琴) 일당이 참석한 가운데 이른바 아시아민족분격대회가 박춘금의 주재로 열렸다. 이 때 박춘금은 새로이 친일폭력단인 대의당(大義黨)을 조직하고 친일관제 민중대회를 열어 일본에 적극 협조할 것을 역설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중국에서 정원간(丁元幹)·정유분(鄭維芬), 만주에서 당춘전(唐春田), 일본에서 다카야마[高山虎雄] 등을 초청, 강연을 하였다.

즉, 동북아시아 대표들이 서울에 모여 일제에의 충성을 맹세하고 우리 나라를 비롯한 아시아 민족이 무모한 전쟁의 제물이 될 것을 강요했던 것이다. 이에 격분한 대한애국청년당 당원들은 회의장소인 부민관을 폭파하기로 결정하였다.

자신이 수색의 변전소 이전작업장에서 입수한 다이너마이트로 사제 폭탄 두개를 만들어 대회 전날 자정이 지난 뒤 부민관 뒷담을 넘어 들어가 무대 뒤에서 변소로 통하는 길에 폭파장치를 해두었다.

7월 24일 대회가 개최되자 삼엄한 경비망을 뚫고 잠입하여 장치한 폭탄을 터뜨리려 하였다. 그러나 동료 중의 한 명이 폭파장치한 선을 잘못 건드려 먼저 폭발하고 말았다. 이 바람에 대회장은 수라장이 되고 선을 건드린 대원은 즉사하고 말았다.

이에 놀란 일본경찰이 정문을 봉쇄, 색출하려 했으나 무사히 빠져나왔다. 다시 거사를 모의하기 위해 경기도 화성군 매송면 노림리의 야학당을 거점으로 계획을 상의하던 중 광복을 맞았다.

상훈과 추모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독립운동사』 7(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6)
『한국독립운동사』 5(국사편찬위원회, 1969)
집필자
장득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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