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사고(士固), 호는 모산(茅山). 정언(正言) 유격(柳格)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시행(柳時行)이다. 아버지는 사인 유영(柳潁)이며, 어머니는 이윤신(李潤身)의 딸이다.
1672년(현종 13)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75년(숙종 1) 도당록(都堂錄)에 들고, 같은 해 수찬(修撰)이 되었다. 숙종 초년에 남인의 논의가 갈라졌을 때, 윤휴(尹鑴)와 대립하였다. 1680년 경주부윤으로 재직하던 중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몰락할 때 파직당하였다.
1682년 남인을 완전히 제거하고자 하는 서인의 과격파 김석주(金錫胄)·김익훈(金益勳)의 무고를 받아 투옥되었으나, 혐의가 없음이 밝혀져 석방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다시 집권하게 되자 승지가 되고 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대사간을 거쳐 1692년 이조참판이 되었다. 1701년 장희재(張希載) 등과 인현왕후(仁顯王后)를 살해하려 하였다는 죄로 위도(蝟島)에 안치당하였다가 1704년 풀려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