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1726년 작. 비단 바탕에 채색. 세로 166.5㎝, 가로 88㎝. 유수의 후손인 유태홍(柳泰弘)이 소장하고 있다.
유수는 호는 성곡(聖谷), 자는 여회(汝懷)로서 1706년(숙종 32) 생원진사시에 합격하고, 1721년(경종 1년) 문과에 급제, 1724년 통정대부가 되었다. 「유수 초상」은 「유순정 초상」·「유홍ㅊ상」과 함께 종가에 전해져온 것으로, 유수가 쓴 「화상자찬(畵像自讚)」에 의하면, 그의 나이 49세 때인 1726년 동래에서 유명한 화사인 진재해秦再奚(1691~1769)가 그린 것이다. 이 초상화는 제작 연대가 확실할 뿐더러 어용화사인 진재해의 이름과 솜씨를 여실히 드러내 준 작품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유수의 초상화는 얼굴이 좌안팔분면(左顔八分面), 몸체가 구분면(九分面)으로서 공수(拱手: 두 손을 앞으로 모음) 자세를 취하고 의자에 앉아 있는 전신상[全身交倚坐像]이다. 사모의 높이는 상당히 높아서 당시의 모자 제도를 반영하고 있다. 짙은 청녹색의 단령(團領)에 부착된 백한흉배문양(白鷳胸背文樣)과 삽은대(鈒銀帶)는 이 초상화를 그릴 당시의 유수의 품계(정3품)를 말해준다[1734년 이전에는 정3품의 경우 백한흉배에 삽은대를 사용하였음].
의자에 깔린 호피(虎皮), 족좌대(足座帶) 위에 ‘八’자형으로 벌어진 발의 놓임, 바닥에 아무것도 깔려 있지 않은 점 역시 영조 연간 초기의 양식적 특색을 보여 준다.
한편 얼굴표현에 있어서 어용화사(御容畵師)로서 진재해의 기량을 보여 주듯이 이목구비를 선묘 위주로 형용하였다. 그러면서 안면의 움푹 들어간 부위를 거듭 칠해 어둡게 함으로써 안면이 지닌 요철(凹凸)을 자연스럽게 유도하였다.
화폭의 좌측 상단에는 유수 자신의 필적으로 된 자찬문(自贊文)이 적혀있다. 그 내용은 유수 자신이 어려서 부모를 잃고 늙어서는 자식이 없었으며, 마음을 가다듬고 벼슬에 나아갔지만 성품이 세속에 굴하거나 아첨하지 않았으며, 권력자와 부귀한 자를 싫어하며 물러가 부모 묘소에 자리하고 살면서 농사짓고 낚시와 바둑으로 소일하며 자연과 벗했다는 것을 적어 넣었다.
이 자찬문은 이 초상화가 그려진지 13년 뒤인 그의 나이 62세 진갑(進甲: 환갑의 이듬해)에 초상화를 보고 감회에 젖어 적은 글이다. 그리고 이 찬문의 아래쪽에도 도장이 4개 찍혀 있다. 위로부터 성곡(聖谷), 진산인(晋山人), 유수(柳綏), 여회(汝懷)라고 쓰여있다. 양각과 음각 도장이 교대로 찍혀 있다.
진주 유씨 종중에는 초상화와 함께 화가 진재해가 보낸 서간 2장이 전해지고 있다. 초상화에 대하여 자신의 소견을 피력하는 내용이다. 정미년(1727) 7월 5일 서한에는 변사, 즉 변상벽(卞相璧)과 다른 견해를 주장하고 있으며, 7월 24일자 편지에서는 완성한 초상화를 보낸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서간의 초상화는 시복본으로 지금까지 전해지지 않는 작품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 서간은 조선시대 그림의 주문과 제작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는 귀중한 사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