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해동(海東)·김세진(金世鎭). 경상북도 안동 출신. 1919년 3·1운동 당시 향리에서 만세시위운동을 주도, 독려한 뒤 상해(上海)로 망명하였다.
1919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합류하였다가 군자금모금이 독립운동을 가장 능률적으로 돕는 일이라 여기고 입국하였다. 국내에서 유성우(柳性佑) 등과 긴밀히 상의하고 군자금조달을 위하여 경상북도 안동·문경·상주 일대에서 현금 310원과 현금증표 5,000원을 모금한 뒤 만주로 건너갔다.
1922년 12월 길림교육회(吉林敎育會)의 운영을 도맡아 교육을 진흥시키면서 표면상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에 가입하여 시기를 관망하였다. 1923년 1월 상해에서 2년 전부터 소집하기로 한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에 참석하여 헌법개정위원과 교육위원장에 선임되어 군자금모금과 독립운동에 관한 제반문제를 외국과 교섭하였다.
그 결과 군기조달을 위한 회의 대표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23년 만주 장춘(長春)에서 임시정부와 업무연락을 비밀리에 추진하다가 일본경찰에 잡혀 1924년 10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다.
198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