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경형(景衡), 호는 봉서(鳳棲). 아버지는 현감 유성주(兪星柱)이며, 어머니는 전주유씨(全州柳氏)로 유덕보(柳德普)의 딸이다. 증조부는 대사헌을 지낸 유언술(兪彦述)이고, 할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유한순(兪漢純)이다. 김매순(金邁淳)·홍석주(洪奭周)·오희상(吳熙常)을 스승으로 섬겼다.
1844년(헌종 10) 학행으로 추천을 받아 선공감감역이 되고 감찰·사직서령·영희전령(永禧殿令)을 역임하였다. 전의현감으로 부임해서는 황구(黃口)·백골(白骨) 등의 가렴주구의 민폐를 없애고 유학의 학풍을 일으키는 데 힘썼으나, 감찰사의 모함으로 홍천에 유배되었다.
유배에서 풀려난 후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을 닦고 후진을 양성하는 데 진력하였다. 윤병정(尹秉鼎)·서응순(徐應淳)·김낙현(金洛鉉)·윤치조(尹致祖)·김윤식(金允植)·남정철(南廷哲) 등의 학자를 길러냈다.
유신환은 이기신화론(理氣神化論)을 주장한 조선 말기 성리학의 대가로서 유학의 여러 경전과 사서(史書)뿐만 아니라 율력·산수 등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의 학문에 정통했으며 정치·경제·군사 등의 분야에도 박학하였다.
당시 유림에서는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의 논쟁이 격화되었다. 호서의 학자들은 그들의 주장인 인물성부동론(人物性不同論)을 천명하기 위해 화양서원(華陽書院)의 묘정에 송시열(宋時烈)의 말인 ‘밀개성신(蜜豈性信)’이라는 문장으로 비를 세우려 하였다.
이에 대해 유신환은 이 문구가 반드시 인물성부동론의 논증이 될 수 없으며, 이 논쟁의 귀추가 확실히 밝혀진 것이 아님을 들어 비석의 건립을 반대해 관철시키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봉서집(鳳棲集)』·『패동수언(浿東粹言)』·『동유연원(東儒淵源)』 등이 있다. 대사헌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간(文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