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종 때 화주방어낭중(和州防禦郎中)으로 있으면서 상서좌사낭중(尙書左司郎中) 하공진(河拱辰)이 동여진(東女眞)을 치다 패배하자 이에 원한을 품고 있다가, 마침 여진족 95명이 내조하여 화주관(和州館)에 이르자 이들을 모두 죽였다.
여진족이 이 사실을 거란(契丹)에 호소하여 거란황제가 군신들에게 “고려 강조(康兆)는 왕을 죽인 대역을 저질렀으니 마땅히 군사를 일으켜 죄를 물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로 인하여 1010년(현종 1) 5월 하공진과 먼 섬으로 유배되었다.
11월에 거란이 서경에 침입하자 하공진과 함께 소환되어 그 관작(官爵)이 복원되었다. 1011년 거란이 쳐내려오자 강감찬(姜邯贊)이 왕에게 남행(南行)을 청하여 채충순(蔡忠順) 등이 호위하여 광주(廣州)로 갔다.
이 때 “하공진이 잡혀갔다.”는 소리를 듣고 따르던 신하들이 두려워 다 도망갔으나 채충순·장연우(張延祐)·주저(周佇) 등과 함께 도망하지 않고 왕을 호종하였다.
광주에 이르렀을 때 “신의 고향인 양성(陽城)이 여기에서 멀지 않으니 청하건대 행차하소서.”하니 왕이 기뼈하여 양성으로 행차하였다.
그날 밤 김응인(金應仁) 등과 함께 어명을 사칭하고 왕의 안장을 뜯어내어 고을 사람들에게 주니 새벽에 현리(縣吏)가 다 도망하였다. 김응인 등과 왕을 호종하다 천안부(天安府)에 이르러 필요한 물건을 준비한다는 핑계로 달아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