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안 유씨(務安兪氏)의 시조. 초명은 유양(兪亮)·유증(兪證), 자는 지일(之一), 호는 퇴사재(退思齋).
고종 때 과거에 급제, 내시(內侍)가 되었는데, 상서 김창(金敞)의 추천으로 정방(政房)에 들어가 최우(崔瑀)의 문객이 되었다. 그 뒤 이부시랑이 되었는데, 몽골의 침입으로 삼척산성의 이동과 관련하여 삼척군민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혐의로 섬에 귀양갔다. 그의 어머니가 뇌물을 바쳐 귀양에서 풀려나게 되었고, 다시 총신(寵臣)에게 뇌물을 바쳐 정방에 들어가서 병부시랑이 되었다.
1263년(원종 4) 12월 추밀원우부승선에 임명되었고, 뒤이어 지주사(知奏事)를 겸하였다. 이 때 전선(銓選)을 맡으면서 가까이 지내는 자들에게 벼슬을 주어 자기의 세력을 넓히는 데 힘썼다. 이에 위사공신(衛社功臣: 최씨 정권을 타도한 세력)들도 권신(權臣)인 김준(金俊)에게 의지해 족속들에게 벼슬주기를 청하자, 의(義)가 아니라고 하면서 그들을 억제하였다. 이 일로 위사공신들과 틈이 생기게 되었다.
한편 대장군 오수산(吳壽山)이 조카 주연(朱然)의 인사 청탁을 거절하자 유천우를 죽이려 할 때, 그로부터 많은 뇌물을 받았던 김승준(金承俊)이 옳지 못한 일이라고 설득해 저지시킨 일이 있었다. 아우인 장군 유원적(兪元勣)이 김준을 제거하려다가 일이 발각되자, 김준에게 불려가 사실을 알리지 않은 죄로 문책을 당하였다. 그러나 늙은 어머니의 마음을 상할까 염려해 고하지 않았다고 함으로써 정상이 참작되어 관직이 파면되는 데 그쳤다.
오랫동안 국가의 중요한 일을 맡아서 사방으로부터 뇌물을 받아 치부했으며, 많은 비용을 들여 선원사(禪源寺)에서 불사를 베풀고 김준의 복을 기원하기도 하였다. 1264년(원종 5) 7월에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가 되었다. 1269년 12월에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이듬해 5월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었다.
1270년 임유무(林惟茂)가 반란을 도모하자, 부당함을 꼬집어 크게 거슬렸으나 임유무가 복주(伏誅)됨으로써 무사하였다. 12월 다루가치(達魯花赤)의 비위에 거슬려 인물도(仁勿島)에 귀양갔으나, 이듬해 3월 풀려났다.
1273년(원종 14) 10월 중서시랑평장사가 되었고, 1275년(충렬왕 1)에 원나라의 간섭으로 관제를 고치면서, 참문학사(參文學事)·판판도사사(判版圖司事)로 격이 낮게 되었다. 11월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로서 원나라에 하정사(賀正使)로 갔다가 이듬해 귀국하였으며, 6월 세상을 떠났다.
1261년(원종 2) 5월 상서좌승으로 국자시를, 1262년과 1274년(원종 15) 5월에는 예부시를 주관한 바 있다. 작고 총민하고 근실했으나 언행이 일치하지 않아 비난을 받았다. 또한 의복·저택을 매우 화려하게 꾸몄으며, 장사현(長沙縣)에 전장(田莊)을 경영하였다.
시호는 문도(文度)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