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행원(行源). 공조판서 유잠(柳潛)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윤 유자신(柳自新)이다. 아버지는 유희갱(柳希鏗)이며, 어머니는 기성군(箕城君) 이현(李俔)의 딸이다. 유희분(柳希奮)의 조카이다.
1605년(선조 8) 사마시에 합격해 생원이 되고, 1609년(광해군 1)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14년 사헌부정언·병조정랑, 이듬 해 필선, 1616년 수찬·제용감정(濟用監正)·군자감정, 1618년 영건도감도청(營建都監都廳)·장악원정을 지냈으며, 다음 해 보덕을 겸하고 호조참의를 거쳐 우부승지에 올랐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숙부 유희분이 참형되고 북인이 쫓겨나자 제천으로 유배되었다. 귀양살이하면서 다른 뜻을 품어, 여인의 가마를 이용해 서울에 있는 광해군 때의 신하로서 새 조정을 원망하는 자들의 집을 내왕하면서 궁중의 시녀와 내시, 대궐문의 수문장 등을 통해 대궐을 쉽게 침입할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미리 자기의 아들과 무리들을 서울에 잠입시키는 한편, 전 세마(洗馬) 허유(許逌), 전 좌랑 정심(鄭沁), 전 전적 김탁(金鐸), 진사 유두립(柳斗立) 등과 모의하고, 전 군수 윤계륜(尹繼倫)과도 몰래 손잡아 내응토록 하였다.
그러나 이 일은 1628년(인조 6) 1월 3일에 전 부사 허적(許𥛚)의 고변으로 거사 직전에 탄로나 버렸다. 비변사에서 군사를 동원해 고변한 허선(許選) 등과 함께 잠복해 동대문과 남대문으로 무기를 싣고 들어오던 거사자들을 모두 체포하였다. 이에 광해군을 상왕으로 삼고 인성군 이공(仁城君 李珙)을 추대하려는 유효립 등의 음모는 불발로 끝나고 가담자 모두 처형되었다. 한편, 고변한 허적 등은 영사공신(寧社功臣)에 책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