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 ()

태교신기
태교신기
개념
아기를 가지면서부터 낳아 기르는 일을 가리키는 교육학용어.
정의
아기를 가지면서부터 낳아 기르는 일을 가리키는 교육학용어.
개설

육아기의 구분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대체로 초등학교 취학 이전까지로 보는 것이 적합하다.

태어나서 6, 7세까지의 이 시기는 모든 신체적·지적·정서적 기반이 형성되는 시기이므로, 어린아이의 몸과 마음의 성장에 장애를 주는 요인을 없애 주고 순조로운 성장을 도와 주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우리 나라는 예로부터 태교(胎敎)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아기를 가지면서부터 어머니는 물론 주위 사람들까지 아기가 편안하고 아름다운 환경에서 자랄 수 있도록 힘써 왔다.

이에 따라 여기에서는 태교로부터 시작하여 출산·유아기(乳兒期)·유아기(幼兒期)까지의 신체 발육과 정신 발달에 수반되는 모든 과정을 총괄하여 다루며, 크게 전통사회와 현대사회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전통사회

육아는 단순히 아이를 기르는 것뿐만 아니라 교육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므로, 전통사회의 육아도 크게 가정에서의 육아와 제도적인 측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일반 가정에서의 어린이 양육에 관한 기록으로 고려 이전의 것은 없으나, 당시의 문화양상으로 미루어 볼 때 조선시대와 흡사했을 것으로 본다. 전통시대에는 육아의 주된 책임이 어릴 때는 어머니나 할머니에게 있었으나, 자라면서 차차 아버지나 할아버지 등 성인 남성이 훈육을 담당하였다.

남아에게는 가부장(家父長)의 역할 및 가정 밖의 활동과 관련된 예절과 생활기능을 주로 남성 가족이 책임지고 가르쳤으며, 여아에게는 가사와 육아 등과 같은 가정 안의 활동과 관련된 교양·기능·태도를 주로 여성 가족이 책임지고 가르쳤다.

가정에서 가르친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생활하는 데 필요한 여러 가지 규범, 즉 교양과 예절을 비롯하여 전래의 민족 고유도덕으로서 상고시대부터 전해 온 충(忠)·효(孝)·인(仁)·신의(信義)·용(勇)·겸양(謙讓)과 세속오계 및 유교·불교 등의 가르침에 의거하였다.

유교적 생활양식이 모든 가정에 정착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유교윤리의 상당 부분이 우리의 고유도덕과 일치하고 있으며, 정서적으로는 불교사상을, 생활윤리로는 치자계층(治者階層)이 준수하는 유교윤리를 숭상했으므로, 아이들에게 요구한 교양과 훈육도 이에 준하였다.

한편, 제도적인 측면에서 볼 때 신라시대에 왕명으로 고아를 돌보는 제도가 있었고, 고려시대에도 양육해 줄 친족이나 친지가 없는 아이는 관가에서 10세까지 보살피도록 식량을 공급했으며, 조선시대에는 자휼전칙(字恤典則)을 시행하여 고아와 부랑아는 관가에서 보호하거나 민가에 수양(收養)하도록 하였다.

교육기관으로는 서당과 고려 말·조선시대 때의 향교(鄕校)가 있었다. 향교에는 7, 8세의 아동도 입학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송나라의 서긍(徐兢)이 쓴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서인(庶人)의 아주 어린아이까지 글을 배웠다고 하였다. 고려시대 이전까지는 성별에 따른 차별 양육은 그리 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부여시대 유화(柳花)가 부모의 허락 없이 해모수와 정을 통했다 하여 쫓겨났다는 기록과, 신라에서도 선화공주가 서동과의 소문으로 유배당했다는 기록 등을 비롯하여 화랑제도가 미혼 여성으로부터 시작되어 명산을 유람하며 심신을 단련했다는 점, 고구려에서는 여성도 말을 탔고 평강공주와 온달의 혼인이 신분을 넘어선 것이었다는 점, 고려시대의 자유분방한 가요의 내용 등으로 미루어 볼 때 남녀 유별을 어려서부터 엄격하게 요구하지는 않았으나 서로 다른 성역할(性役割)을 가르쳤다고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다산(多産)의 가치는 존중되었으나 아직 다남(多男)의 가치를 절대시하는 유교사상이 뿌리내리지 못했던 시대였으므로, 양육 과정에서 남아와 여아를 크게 차별하지는 않았다고 본다. 이제부터는 주로 조선시대를 중심으로 하여 당시의 육아방식과 내용 등을 살펴보기로 한다.

태교

우리 나라의 전통적인 육아 과정은 태교에서 시작된다고 하겠다. 태교는 오랜 옛날부터 선대의 경험으로 구전되어 지켜져 왔으나,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보급된 것은 고려 말경 중국에서 태교에 관한 서적이 전래되면서부터이다. 조선시대에는 일반 가정에까지 널리 보급되어 지켜지게 되었다.

중국의 태교는 『대대례기(大戴禮記)』·『안씨가훈(顔氏家訓)』·『소학(小學)』 등을 통하여 우리 나라에 전해졌으며, 우리 나라에서도 의학서인 『동의보감』과 여성 교양서인 고려 말 정몽주(鄭夢周)의 어머니 이씨가 지은 『태중훈문(胎中訓文)』을 비롯한 『규합총서(閨閤叢書)』·『규범(閨範)』 등을 통해 보급되다가, 본격적인 태교연구서 『태교신기(胎敎新記)』로 집대성되었다.

이렇게 전해진 태교의 내용은 주로 가까이 두고 보아야 할 것, 보고 들어서는 안 될 것, 삼가야 할 행동, 근신할 일, 음식 금기, 먹으면 좋은 음식, 약물 금기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근세에는 천도교의 경전에 내칙(內則)으로 강조될 정도로 신분의 차이 없이 전통사회에서 일관성 있게 준수되었다. 이와 함께 임신을 전후로 임산부나 가족 등이 꾸는 태몽(胎夢)은 태아의 성별과 태어난 뒤의 복록(福祿)까지도 예언한다고 믿었다.

해산

민가의 해산속(解産俗)으로 알려진 것은, 산기가 있으면 삼신[胎神]할미에게 삼신상을 차려서 순산을 빌고, 경험 많은 안노인이 조산(助産)을 하였다.

순산을 비는 풍속으로 안동지방에서는 산모에게 날달걀 먹이기, 제주도지방에서는 메밀수제비 먹이기, 박천지방에서는 남편이 지붕에 올라가 용마루를 잡고 용쓰기 등이 있었고, 산모가 남편의 상투 붙잡기, 굴뚝에 부채질하기 등 다양한 양상을 나타내고 있다.

아기가 태어나면 대문이나 부엌문에 왼쪽에서부터 금줄을 치는데, 금줄에는 아들이면 붉은 고추와 숯덩이를 꽂고, 딸이면 솔가지와 숯덩이를 꽂았다.

삼을 가를 때는 아들이면 낫이나 칼로 가르고, 딸이면 가위로 끊었으며, 아기의 장수를 위하여 부모가 이로 탯줄을 끊기도 하였다. 여아에게는 삼칠일(三七日) 전에 젖꼭지를 짜 주어 예쁜 가슴을 갖게 하면서 장차 젖먹이는 데 편리한 젖꼭지가 되도록 하였다.

젖주기와 젖떼기

젖주기[授乳]는 때없이 아기가 원할 때 주었으나 그 태도는 대단히 엄격하여, 양반 집안에서는 시부모의 감독을 받았다. 젖을 먹일 때는 먼저 조금 짜낸 뒤 먹이며, 등과 배·발을 따뜻하게 하고 머리와 가슴은 서늘하게 해서 먹이도록 하였다.

아기가 울음을 막 그쳤을 때와 어머니가 졸릴 때는 먹이지 않으며, 젖먹는 아기를 웃기지 않고 쓰다듬고 어루만지면서 먹이고, 아기 코가 어머니 젖에 눌리지 않도록 하여 왼쪽으로 안고 먹였다.

아기가 걸을 수 있고 동생이 잉태된 다음에야 젖을 떼기 시작하는데, 동생이 잉태되면 어머니는 엿기름이나 인삼을 먹어서 젖이 마르게 하였다. 또 젖을 떼기 위해 아기는 할머니와 함께 기거하고, 할머니가 빈 젖을 빨리며 키웠다. 젖떼기[離乳] 먹이로는 미숫가루·밤죽·백무리·눌은밥 등이 있었으나, 주로 밥을 국이나 물에 말아서 먹이거나 죽을 먹였다.

아명과 관명

이름에는 아명(兒名)과 관명(冠名)이 있었는데, 아기의 사망률이 높았던 전통사회에서는 유약한 아기를 보호하기 위한 예방의학적 지혜의 하나가 아명이었다.

아명은 주로 비천한 막이름을 지어 귀신을 속이려는 목적에서 부르는 이름으로, 남아에게는 주로 개똥이·뺑이·망아지·똘똘이 등이 사용되었고, 차돌이·바우 등 강한 상징을 지니도록 한 것도 있었다. 사가(私家)에서 자라던 고종의 아명도 개똥이였다고 한다.

여아의 아명은 주로 아들을 기대했다가 딸을 낳은 분함과 다음에 아들을 기대하는 의미, 그리고 딸을 그만 낳으라는 의미 등에서 분순이·분이·분녀·후불이·놈이·놈세·바래·바리·딸맥이·딸고만이·꼭지 등이 있다.

태어난 곳이 외가일 때는 외순이·외놈이, 몸에 지닌 특징에 따라 점이·점례·점순이, 예쁘라는 기대에서 옥이·여삐 등 그 소원과 기대에 따라 다양하였다.

이러한 아명은 뒤에 항렬자를 따라 관명으로 고쳐 불렀는데, 여아에게는 관명이 없었다. 관명은 15, 16세의 관례(冠禮)와 함께 지어진 이름이라고 하나, 관례 때까지 살아남을 것을 믿고 미리 지어서 족보에 올리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나 적어도 두 돌 전에는 관명을 짓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두 돌까지가 아기의 사망률이 가장 높았기 때문이다.

아기의 행사

아기에 관한 행사도 여러 가지였다. ‘대역(大疫:天然痘)·소역(小疫:紅疫)을 다 치러야 내 자식이다.’, 또는 ‘자식은 잘 길러야 반타작이다.’라는 속언이 있었을 정도로 아기의 사망률이 높았던 전통사회에서는 아기 출생과 동시에 금줄을 대문에 걸어서 바깥사람의 출입을 통제하였다.

외인의 출입 금지는 주로 전염병을 옮기기 때문이며, 비록 가족이라 하더라도 금줄 아래로 통할 때 제독(除毒)이 되도록 금줄에 숯덩이를 꽂았다.

금줄은 보통 21일간, 즉 삼칠일에 걷고 친지들에게 아기를 인사시키며, 미역국물과 밥알을 아기에게 맛보이는 등으로 미각훈련을 시켰다. 이런 미각훈련은 편식을 예방하고 뒤에 부자가 되라고 비는 뜻이었다.

백일(百日)은 완전수를 의미하는데, 즉 아기와 산모에게는 두번째의 위험한 고비가 된다. 삼칠일 전에 죽는 아기와 산모가 많았고, 삼칠일을 무사히 넘기면 백일까지 살아남는 것이 과제였다. 이러한 뜻에서 무사히 백일을 넘긴 것을 축하하는 작은 잔치를 베풀었다.

백일을 넘긴 아기는 돌까지 살아남기가 또한 힘들었으므로, 세번째 위험한 고비를 무사히 넘겨 돌이 되면 돌상을 차려 아기 앞에 놓아 두고 아기의 장차 운세와 부귀를 점치기도 하였다. 돌상에는 아기가 즐겨 먹는 음식보다는 상징적인 장명(長命)·부귀(富貴)를 위한 물품을 차려 놓았다.

돌을 기준으로 하여 아기에게 비로소 아래옷을 입히고 꽃버선을 신겼으며, 남아의 돌옷은 쾌자까지 갖추었고, 여아에게는 조바위를 씌우기도 하였다. 돌에는 백일보다 더 다양한 음식을 먹여 아기의 미각을 개발하였다.

아기놀이

놀이로는 출생 후 1개월 정도 되면 목운동을 위하여 ‘도리도리’를 가르쳤다. 또한 손과 눈의 협응을 위하여 두 손이 마주치게 하는 ‘짝짜꿍’과 한 손의 손바닥에 다른 손의 검지손가락을 부딪치는 ‘곤지곤지’를, 손가락의 미세한 근육운동으로는 두 손의 손가락을 일시에 오므렸다 폈다 하는 ‘잼잼’ 등을 가르치는 동작훈련이 있었다.

또한 서기 전에 다리에 힘을 올려 주기 위해 어른의 손바닥 위에 아기를 올려 놓고 드는 ‘고네고네‘, 전신운동으로 아기의 겨드랑이에 두 손을 넣어 붙잡고 아기 몸을 흔드는 ‘불무불무’ 등도 있었다.

생후 1개월이 지나 목을 가누게 되면 아기를 업어 주었는데, 이때는 주로 어머니나 할머니 등 성인이 업었다. 그러나 좀더 자라면 누나나 언니 등이 업고 다니면서 놀이를 하기 때문에 업힌 아기는 등을 타는 기술을 익혔고, 아는 사람에게 웃고 소리지르며 다양한 경험을 보고 듣고 배우며 자랐다.

아기놀이는 언제나 성인과 함께 즐겼는데, 어머니나 할머니가 업고 불러 주던 자장가 중 대표적인 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가사로 되어 있다.

자장 자장 워리

자장 우리 개똥이 잘도 잔다.

꼬꼬 닭아 울지 마라

멍멍 개야 짖지 마라

우리 언년이 잘도 잔다.

은자동아 금자동아

나라에는 충성동아

부모에게 효자동아

이웃간에 귀염동아

형제간에 우애동아……

또한 「세상달강」·「까치야 까치야」·「약손」 등의 동요를 겸한 놀이와 심리요법으로 키웠다.

나들이

전통시대에는 아기의 외출이 대단히 위험시되었다. 외가에서 태어난 아기가 처음 친가에 올 때, 친가에서 태어난 아기가 외가에 갈 때는 도중에 전염병균이나 잡귀가 붙는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예방법으로 ‘뒷간에 다녀서 외출하기’가 있었는데, 뒷간 냄새와 암모니아가스로 잡귀를 쫓고 병균을 소독한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황칠하고 나들이 가기’도 있었는데, 부엌에 들러 솥 밑의 검정을 아기 얼굴에 바르면 아기가 미워 보이기 때문에 잡귀가 근접하지 않고, 숯검정이 전염병균을 소독해 준다고 생각하였다.

대소변 가리기 훈련

오줌·똥을 가릴 수 있게 하는 배변훈련(排便訓練)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애 하나 키우자면 똥가루 서 말을 먹어야 한다.’ 느니 ‘때가 되면 저절로 가린다.’ 라는 말이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배변훈련은 젖뗄 때쯤 비교적 늦게 시작되었던 것 같다.

육아 경험이 풍부한 할머니가 젖떼기와 배변훈련을 담당했기 때문에 엄격한 훈련방법은 아니었다. 배변훈련을 위해서는 미리 ‘단지팔기놀이’로 불결의식을 가지게 하였다.

기저귀는 사용하지 않았으나 변기로는 요강을 사용했고, 「꼬부랑할미」와 같은 동요로 즐겁고 재미있게 배변훈련을 시켰다.

다 자란 아이가 배변훈련의 미완성 또는 동생이 생겨 퇴행 증세로 야뇨증(夜尿症)이 나타나면 ‘키를 씌워 소금 꾸러 보내기’와 같은 충격요법의 특징을 가진 촌극으로써 증세를 치료하였다.

발달특징

젖먹이를 지나 ‘고운 세 살’과 ‘미운 일곱 살’이 되면 숟가락을 쥐고 스스로 밥을 먹을 줄 알게 되며, 또한 힘든 배변훈련을 완수하면 어른들의 육아 책임은 가벼워진다.

이 때 서너 살 되는 아기가 유아어(幼兒語)로 재롱까지 피우면 ‘고운 세 살’이라 했고, 대여섯 살이 되면 어린 동생에게 질투하는 행동을 보이고, 퇴행으로 오줌을 싸며, 호기심으로 집 안을 어지럽히고 자발성감(自發性感)의 발달로 어른들에게 순종하지 않기 때문에 ‘미운 일곱살’이라고 불렀다.

이 특유의 우리 나라식 발달 용어는 시기별로 적절한 발달 특징을 나타낸다. 특히 ‘미운 일곱 살’이라는 의미는 빨리 7세가 되어 성별에 따라 역할을 배우면 한결 쉬워진다는 희망과, 이젠 자라서 품안을 떠난다는 서운한 감회도 함께 포함한 의미로 쓰였다.

어린이 놀이

어린이의 놀이는 고운 세 살 때부터 이거래저거래·술래잡기·깨금뛰기·자치기·제기차기·공기받기·소꿉놀이·연날리기 등을 했는데, 어린이의 성별에 따라 점차 분화되어 갔다.

또 다래끼·체증·복통·부스럼 등과 밤에 뒷간 가는 버릇을 고치기 위한 심리적 치료법과 버릇교정법을 놀이와 함께 발달시켰다.

때로는 액연(厄鳶) 띄우기·더위 팔기·나무 시집보내기·쥐불놀이·호랑이그림 붙이기·숟가락 물려받기 등 세시풍속과 결부시켜 방액(防厄)·장명을 빌기도 하였다. 글공부에 대한 동기를 유발하기 위하여 종경도(從卿圖)놀이 등의 윷판으로 즐기도록 하기도 하였다.

훈육

아이들의 훈육(訓育)은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이라는 유교원리에 따라 7세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 이전에는 엄격한 식탁예절을 비롯한 존칭어 사용 문제와 행동 등이 대체로 자유롭게 허용되었으나, 오른손을 사용하며 제자리에 바로앉아서 식사하는 법 등은 어려서부터 훈육하였다.

7세가 되면 훈육이 보다 엄격해졌으며, 심부름·동생 보기·집안일 돕기 등을 맡아하게 하였다. 그리고 가족의 호칭·촌수, 가족의 역사, 조상의 이름자 등을 정확히 알도록 했으며, 의복을 단정히 입는 법과 앉고 서는 법 등도 훈련받았다.

전통사회의 훈육은 아이들에게 어른의 구실을 가르치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그래서 남아는 7세만 되면 사랑방에 기거하면서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조수(助手)로서, 손님 응대·제사 받들기·실내 정리 등 장차 가부장으로서 알아야 할 구실을 배웠다.

주로 글공부도 이 시기부터 시작했고, 삼강오륜에 의한 5대 구실을 가르쳤다. 여아는 어머니나 할머니를 따라 음식 만들기·바느질·길쌈 등 가사와 육아를 돕고, 예절과 한글을 배웠다.

남존여비의 성차가치(性差價値)에 의해서 육아상의 혜택도 거의 남아 위주였다. 여아에게는 오륜 중 신하로서의 구실이 제외된 4대 구실이 요구되었고, 문 밖 출입이 통제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렇듯 엄격한 언어·행동의 훈육 가운데서 널뛰기·그네뛰기·다리밟기·달맞이·윷놀이 등 세시풍속에 따른 놀이는 허용되었고, 각종 수수께끼·이야기·동요 등으로 유머감각·어휘력·연상력의 발달을 돕고, “가갸 가다가 거겨 거렁에…….” 등 한글도 노래로 가르쳤다.

현대식 육아

서구식 육아법

광복 후 서구 문물의 도입으로 서구식 육아법이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여성교육의 보급은 서구식 육아법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교육받은 여성들에게서 시작된 서구식 육아법은 금줄이 없어지고, 인공유(人工乳)의 사용, 조기 이유(早期離乳)와 조기 배변훈련, 독립심훈련, 소수 자녀 출산, 핵가족화 등의 경향으로 나타났다.

또한 여성의 취업이 증대되자 서구식 육아법은 보다 신속히 보급되어 교육 수준과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을수록, 도시 생활자일수록 서구식 육아법으로 양육하고 있으며, 전통적 육아방식은 일부 농어촌에나 남게 되었다. 그러나 농어촌의 경우도 가정 밖에서 여성의 노동이 증가됨에 따라 육아방식에 변화가 생기고 있다.

또한 분유와 같은 인공유가 보급되자 인공유의 수요가 계속 증가되고 있고, 엄격한 시간제 수유가 보편화되었다. 이는 유동적으로 아기가 원할 때마다 어머니의 가슴을 향유할 수 있는 전통적 수유방식을 대신하게 되었다.

이러한 인공유의 사용으로 여성의 출산 간격, 즉 터울이 빨라지기 시작하여 3, 4세의 터울이 2, 3년 또는 연년생의 터울로도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조기 이유는 이유식의 발달을 가져오게 되어 외국의 이유식이 수입되고, 국내에서나 가정에서도 각종 이유식이 개발되었다. 따라서 젖떼기는 생후 3∼6개월이면 시작되었다. 조기 배변훈련 역시 6∼8개월이면 아기 변기를 이용한 훈련이 이루어졌고, 아기 침대·아기방과 같은 독립심훈련을 위한 서구식 방법이 이용되었다.

여성취업화 및 핵가족화는 어머니나 할머니가 아닌 가정부가 육아 담당자가 되었고, 다양한 간식과 장난감이 보급되기도 하였다.

육아 기관

육아를 위한 제도적 기관으로는 크게 교육기관과 양육기관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이전에 있던 각종 유아교육체계를 1983년부터 5, 6세 정도의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유치원(幼稚園)과 5, 6세 미만의 유아를 대상으로 하는 유아원(幼兒園)으로 이원화하여 정비하였다.

유치원은 1907년 학부관제에 유치원교육이 포함되면서 제도적 유아교육기관으로 정착되었으며, 1909년 함경북도에 정토종포교자원(淨土宗布敎資園)에 의해 나남유치원(羅南幼稚園)이 세워졌는데, 이것이 우리 나라 어린이를 모아 보육한 최초의 유치원이다.

그 뒤 1913년에 경성유치원, 1914년에 이화유치원 등이 설립되었으며, 1921년의 통계에 따르면 전국에 47개 소의 유치원이 있었는데, 이 중 우리 나라 어린이를 위한 것이 32개 소, 한일 합동이 6개 소, 나머지가 일본인 자녀를 위한 것이었다.

광복 후 「교육법시행령」이 공포되어 유치원에 관한 각종 기준이 마련되었다. 이에 따라 유치원 수는 1965년에 423개 소, 1975년에 611개 소, 1980년에 901개 소였으며, 원생 수는 1965년에 1만 9566명, 1975년에 3만 2032명, 1980년에 6만 6433명으로 증가되었다.

그 뒤 유아교육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유아교육진흥법」 반포 등 각종 제도적 지원과 부모의 교육열 증가 등으로 1985년에는 유치원 수 6,242개 소에 원생 수 4,692명을 수용하기에 이르렀다.

유아원은 1920년대에 취업 여성의 자녀를 일정 기간 맡아 돌보는 탁아소의 형태로 출발하였다. 1968년 통계에 따르면 전국에 292개 소의 탁아소가 있었고, 2만 5443명의 유아를 수용하였다고 한다.

1968년 3월 탁아소를 어린이집으로 명칭을 바꾸고 유치원의 교과과정을 도입함으로써 질적 변화를 일으켰으며, 1970년에 377개 소, 1975년에 591개 소로 증가되었고, 1981년에는 706개 소에 4만8983명의 유아를 수용하였다.

그 뒤 1982년 12월 「유아교육진흥법」이 공포되어, 보건사회부가 관장하고 있던 어린이집 706개 소와 내무부가 1981년에 설립하여 운영해 온 새마을협동유아원 263개 소, 1966년 농촌진흥청이 설치, 운영하던 농번기유아원 382개 소 등을 합병하여 새마을유아원으로 개칭하였다. 1998년에는 8,973개 소의 유치원에 교원 수는 2만 6721명이었고, 원생 53만3921명을 수용하고 있었다.

이들 유치원과 유아원은 교육계획에서부터 교육프로그램의 연구에 이르기까지 영세성을 면치 못하여, 제도적 지원과 함께 전문적이고 합리적인 경영과 연구가 이루어져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양육기관으로는 부모가 없거나 특수한 사정으로 건전하게 양육될 수 없는 어린이를 일정 기간 동안 집단 보호, 양육하는 고아원이 있다.

「아동복지법」에 의하면 5세 미만의 고아를 수용하는 시설은 영아원이고, 5세부터 18세까지의 고아를 수용하는 시설은 육아원이라고 한다.

현대적 의미의 고아원은 1888년 명동성당에 설립된 천주교보육원이 그 시초이며, 일제 말기의 혼란한 사회정세 속에서 고아와 극빈 아동들이 증가되어 광복 당시 33개 소의 고아원이 있었다.

그 뒤 6·25전쟁을 거치면서 전쟁 고아와 보호아동이 대량으로 발생했으며,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주로 기아·미아 등이 보호시설에 수용되었다. 1995년에는 전국에 269개 소의 아동복지시설이 있었으며, 1만8074명의 아동을 수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존의 아동보호시설로는 보호아동을 적절히 수용하기 어려운 실정이므로, 양부모와의 결연사업을 비롯한 가정위탁양육사업·해외입양사업 등을 확충하여 심신이 건강한 성인으로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야 할 것이다.

전통 육아 가치의 재인식

오늘날 여성 취업인구의 증가현상과 핵가족의 보편화, 가족계획운동, 아동관의 변화 등은 서구식 육아법이 자연스럽게 정착하는 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가정부가 육아를 담당하는 데서 일어나는 문제를 비롯하여 인공유로 키운 부작용, 조기 이유와 조기 배변훈련이 낳은 정서적 불안정, 지나친 독립심의 강조에 대한 반작용 등은 서구식 육아법에 대한 비판을 낳게 하였다.

더욱이 여성교육의 향상 및 고학력화에 의해 서구 문물의 단점을 바로 보는 안목을 키운 결과, 전통적 육아법을 비롯한 우리의 전통문화에 대한 가치를 발견, 재인식하는 경향으로 나타났다.

뿐만 아니라 서구에서 일고 있던 엄격한 시간제 수유와 조기 이유 등에 대한 비판과 함께 우리 나라 전통 태교의 지혜와 융통성 있고 관용성 있는 어린이 중심의 전통육아방식을 심리학적·교육학적 이론으로 그 가치를 증명하고 긍정적인 해석을 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이러한 재인식은 다시 모유 먹이기를 권장하고 아기의 개인 차에 따른 이유 및 배변훈련 시기와 방법의 조절로 나타나고 있으며, 육아에 있어 조부모 세대(祖父母世代)의 공헌을 인식하고 있다.

현대 육아에서 나타난 몇 가지 특징은 모성 취업으로 인한 모성 실조(母性失調), 장난감의 보급, 대중매체와의 빈번한 접촉, 이유식·간식의 보급 등을 들 수 있다.

도시는 물론 농어촌에서도 각종 탁아시설이 필요해졌고, 유아원과 유치원에 보내는 일이 많아지고 있다. 따라서 전통적으로 가정에서 가족이 담당하던 육아의 책임이 점차 제도적 기관으로 이관되는 추세로 변모해 가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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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교육론』(류안진, 창지사, 1984)
『육아론』(류안진, 문음사, 1982)
『한국전통사회의 유아교육』(류안진, 정민사, 1980)
『아동복지』(구자헌, 한국사회복지연구소, 1968)
『한국야담전집』 1∼12(삼성출판사, 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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