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사달(士達) 또는 대원(大源), 호는 경암(敬庵). 윤선거(尹宣擧)의 증손자로 윤자교(尹自敎)의 아들이다. 처음 부모의 명에 따라 과시(科試) 준비를 하였으나, 얼마 뒤 그 뜻을 버리고 성리학 공부에 전념하였다.
1706년(숙종 32) 우의정 최석정(崔錫鼎)의 추천으로 내시교관에 제수되고, 1710년 시강원자의, 이듬 해에 종부시주부를 거쳐 익위사위수(翊衛司衛率)가 되고, 1716년 사헌부지평에 올랐다. 그러나 사문시비(斯文是非)에 관계되어 파직되었다가 한 달만에 복직되었다.
이듬 해 증조부 윤선거와 종조부 윤증(尹拯)에게 추탈(追脫)의 화가 미치자 벼슬을 버리고 종적을 감추었다가, 1722년(경종 2) 윤선거와 윤증의 관작이 복위되고 시호가 내려짐에 따라 사헌부지평에 다시 기용되었다.
이어 시강원진선(侍講院進善)으로 옮겼다가 이듬 해 사헌부장령에 강직(講職)을 겸하고, 이어 성균관사업(成均館司業)을 거쳐 단양군수로 나갔다. 1724년 하차은 사건으로 벼슬을 사직하고 돌아왔으나 다시 장령에 임명되었고, 1727년(영조 3) 진선과 집의를 거쳐 군자감정에 제수되었으며, 승정원동부승지에 제수되었다.
이듬 해 청주의 이인좌(李麟佐)의 난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이끌고 달려가던 중 난이 평정되었다는 말을 듣고 성에 들어가지 않고 집으로 돌아갔다가 이것이 허물이 되어 파직되었다. 이듬 해 다시 승지로 복직된 뒤 1731년 호조참의, 1737년 공조참의를 역임하였다.
학문에도 매우 전심하여 영조가 두 번이나 별유(別諭)로 소명(召命)하여 『주역』과 『성학집요』를 강의시킨 일이 있다. 저서로는 『경암유고(敬庵遺稿)』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