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여망(汝望), 호는 석호(石湖). 아버지는 대사간 윤황(尹煌)이며, 어머니는 창녕성씨(昌寧成氏)로 성혼(成渾)의 딸이다. 김집(金集)의 문인으로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과 교유하였으며, 조익(趙翼)·김상헌(金尙憲) 등에게도 배웠다.
1630년(인조 8) 생원시에 합격하고, 1633년 식년문과에 급제, 승문원주서·시강원설서, 예조와 병조의 좌랑을 거쳐 제천현감·춘추관수찬관 등을 역임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사간원정언으로 척화의(斥和議)를 진계(陳啓)하였고, 그 해 12월 청나라가 침입하자 아버지를 따라 인조를 남한산성으로 호가(扈駕)하였다.
그 뒤 동부승지·호조참의·경주목사·홍문관부제학·대사헌·이조참판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응하지 않았다. 윤문거는 『근사록(近思錄)』과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등을 가까이 하면서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또 글씨에도 뛰어났는데, 특히 해서를 잘 썼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연산(連山)의 구산서원(龜山書院), 노성(魯城)의 노강서원(魯岡書院), 석성(石城)의 봉호서원(蓬湖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석호유고(石湖遺稿)』 3권이 있다. 시호는 충경(忠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