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8년(고종 25) 충청남도 공주 출생으로, 본명은 교중(敎重)이다. 서울 명동의 경성학당 중학부를 마치고 도일해 후쿠시마현[福島縣]반조중학교[盤城中學校] 3학년에 편입했고, 이듬해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고등예과를 거쳐 정경과(政經科)로 진학했다.
이 때 조선황실의 관비유학생으로 선발되었으나 정경과생에게는 지원이 중단되는 조선통감의 조치 때문에 도쿄고등상업학교로 전학해 졸업했다. 졸업 후 귀국해 도쿄고등상업학교시절 친구였던 일본인 모리 고야치가 이사로 있던 관립 한성수형조합(漢城手形組合)에 근무하면서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강사로 활동했다.
한일강제병합 이후에는 『매일신보』 기자로 활동하며 문필생활을 시작했고, 1912년에는 작가 조일재(趙一齋)와 함께 신파극단 문수성(文秀星)을 창단해 배우로도 활약하는 등 연극활동을 겸했다.
1913년 『매일신보』 편집국장을 거쳐 잡지사인 반도문예사(半島文藝社)를 세우고 월간잡지 『예원(藝苑)』을 발간했다. 1916년 이기세(李基世)와 함께 신파극단 예성좌(藝星座)를 조직했으며, 1917년 백남프로덕션을 창립해 몇 편의 영화를 제작, 감독하기도 했다.
1918년 김해 합성학교(合成學校) 교장을 거쳐, 『동아일보』에 입사했다. 이 시기에 단편소설 「몽금(夢金)」을 발표하고 「수호지(水滸誌)」를 번역했으며, 1919년 한국 최초의 대중소설인 「대도전(大盜傳)」을 연재했다.
이어 1920년 『동아일보』에 신극사(新劇史) 최초의 연극론인 논문 「연극과 사회」를 발표했다. 그는 소설창작에 이어 희곡 「국경」과 「운명」을 발표했다. 「운명」은 1921년 이기세가 주재하는 예술협회의 제1회 공연으로 상연되었다.
1922년 민중극단(民衆劇團)을 조직해 자신의 희곡 「등대지기」·「기연(奇緣)」·「제야의 종소리」 등과 번안·번역극 등을 상연했다. 1923년 한국 최초의 극영화인 「월하(月下)의 맹서」의 각본과 감독을 맡았다.
이후 조선키네마에 입사해 「운영전(雲英傳)」을 감독했고, 1925년 윤백남프로덕션을 만들어 「심청전」을 제작했다. 1930년 연극으로 눈을 돌려 박승희(朴勝喜)·홍해성(洪海星)과 경성소극장(京城小劇場)의 창립동인이 되었으나 곧 유산되었다.
1931년 창립된 신극단체 극예술연구회의 창립동인이었으나 1920년대 중엽 이후로는 실제로 연극일선에는 거의 나서지 않았다. 1934년 만주로 건너가 역사소설 「낙조의 노래」와 「미수(眉愁)」 등을 집필했고, 해방 후 귀국해 1953년 서라벌예술대학 학장, 1954년 초대예술원회원을 역임했다. 주요 소설로는 「사변 전후」·「추풍령」 등이 있고, 희곡집으로는 『운명』이 있다.
그의 작품은 초기 계몽주의적·인도주의적 경향을 띠었다. 예컨대 「대도전」·「흑두건」 등과 같은 소설은 도둑의 이야기로 혼란된 사회상황 하에서의 집단적 폭력의 문제를 서술했으며, 또 경향소설적 면모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그의 경향은 점차 현실패배적인 역사소설이나 야담류로 흐르게 되었고, 1933년 무렵에는 본격적인 야담가로 나서기도 했다.
그의 희곡은 신여성에 대한 매도와 구식 결혼제도 비판이라는 주제를 통해 보수와 진보사상을 동시에 드러냈는데, 이는 개화시대 지식인들의 과도기적 복합성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그의 논문 「연극과 사회」는 크레이그(Craig,G.)의 「극예술론」에 바탕으로 우리의 관점에 입각해 쓰였는데, 소박한 논조이기는 하나 당시 연극계에 큰 충격을 던져주었다.
그는 개화기의 선구적인 인물로서 금융인으로 출발해 언론인·연극인·교육자·문인·영화인·만담가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활동을 펼쳤다. 특히 그는 영화계에 선구적 공적을 남겼고 연극인으로서도 초창기에 극단을 주재하고 희곡을 쓰는 등 신파극을 정화하고자 노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