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파평(坡平)으로, 문하시중 윤관(尹瓘)의 손자이다.
1209년(희종 5) 왕이 연경궁(延慶宮)으로 행차할 때 우어사(右御史)로서 좌어사 최부(崔傅)와 더불어 호종의 임무를 맡고 새벽에 궁궐에 갔으나, 저녁 때가 되어도 왕이 오지 않으므로 술을 마시고 주정을 부린 일로 양주부사(梁州副使)로 좌천되었다.
1214년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郎)이 되었고, 이듬해 최충헌(崔忠獻) 앞에서 이규보(李奎報)·진화(陳澕), 중 혜문(惠文) 등과 시회(試會)를 한 인연으로 중용되기를 기대하였으나 평소 사이가 좋지 않던 우복야(右僕射) 정진(鄭稹)을 모함하다가 도리어 무고죄로 섬에 유배되었다가 소환되어 오는 도중에 죽었다.
문학으로 이름이 났으나, 주색을 좋아하고 조정의 정사가 뜻에 맞지 않으면 시를 지어 비방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광인(狂人)이라 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