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명은 윤원재(尹元載)로, 수주(樹州) 수안현(守安縣: 지금의 경기도 부천) 출신이다.
성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목종 때 감찰어사가 되었고, 현종이 즉위한 뒤 시어사(侍御史)가 되고, 1013년(현종 4) 9월 내사사인(內史舍人)으로 국사수찬관(國史修撰官)을 겸하였다.
이듬해 8월 송에 사신으로 가서 금실로 짠 용봉(龍鳳) 무늬가 놓인 안장과 복두(幞頭) 등을 진상하고 예전과 같이 통호(通好)하기를 청하니, 송 황제가 등주(登州)에 조(詔)를 내려 해안에 관사를 두고 대접하도록 하였다.
여러 벼슬을 거쳐 1016년 1월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이듬해 4월에는 문하평장사 최항(崔沆)과 함께 사주(泗州: 지금의 경상남도 사천)에 가서 안종(安宗: 현종의 아버지 郁)의 자궁(梓宮: 왕 및 왕족의 유해를 모시는 관)을 옮겨왔다.
1018년 9월에 중추사, 1020년 5월 우산기상시 검교사도 상주국(右散騎常侍檢校司徒上柱國), 이듬해 8월 검교태위(檢校太尉)가 되었으며, 추충좌리공신(推忠佐理功臣)에 봉하여지고 12월 세상을 떠났다.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장경(莊景)이다. 성품이 침착, 엄격하고 외모가 아름다웠으며, 해서를 잘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