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북도 의주 출신. 윤연석(尹連錫)의 아들이다.
1909년 고향에서 선교사의 노방전도를 받아 기독교인이 된 뒤 고향인 광평면에 상광교회(上廣敎會)를 세웠고, 그 곳의 조사(助事)로 전도활동을 하였다.
또 두룽붕 가산리교회 등에서 영수(領首)직으로 봉사하기도 하였다. 1919년 3·1운동 당시, 광평장터에서 3월 15일 2만 여명의 면민과 시장사람을 동원하여 만세운동을 주동하였고, 그로 인하여 1년간의 옥살이를 겪었다.
1920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뒤 평북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용계동교회에서 시무하였다. 1923년 목사 사임 후 상해로 건너가 잠시 임시정부 군자금 모금활동을 하였다. 난징대학[南京大學]에 입학하여 학업 중 1924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신학교에서 본격적인 신학공부를 하였다.
1929년 귀국 후 신의주 제일교회에서 시무하였고, 1939년에는 총회장에 선출되었다. 신사참배와 창씨개명 반대로 일제경찰의 주시를 받아오다가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즉시 구속되어 6개월간 옥살이를 겪었다.
그 뒤 교회로부터 강제추방되어 백마에서 은둔생활 중 광복을 맞았고, 광복 후에는 평안북도 치안을 유지하는 데 힘을 쏟았다.
소련군 진주 후 월남하여 미군정하에서 충청북도 지사로 활동하였고, 6·25사변 때에는 미문화원과 극동 유엔군사령부에서 활동하는 한편, 국정교과서 편찬에도 관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