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산광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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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
평안남도 순천군 신창면 숭산리에 있는 금 · 은 광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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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평안남도 순천군 신창면 숭산리에 있는 금 · 은 광산.
내용

순천군 은산면·신창면과 성천군 영천면과의 경계를 이루는 숭아산(崇娥山, 685m) 북동쪽 중복의 300m 높이에 있다. 부근은 캄브리아계의 조선계(朝鮮系) 지층이 넓게 발달하여 있으며, 그 대표적 지층인 대석회암통(大石灰岩統)을 이루고 있는데 중생대 말기에 심한 지각변동이 있었다.

이때 격심한 충상단층(衝狀斷層)을 수반하는 조산운동이 있었으며, 화강암의 병입(迸入)으로 운모편암(雲母片岩)을 주로 한 함금석영맥(含金石英脈)이 발달하였다. 화강암이 병입한 뒤에 오랫동안 건조 시기가 계속됨에 따라 삭마작용(削磨作用 : 깍아 문지름)을 크게 받아 광맥이 지표 가까이에 노출되어 이른바 한국식 금광맥을 형성하고 있다.

은산광산이 있는 숭아산은 평안남도의 중앙에 남아 있는 잔구(殘丘)의 하나로서 지표 가까이의 금광맥이 노출됨에 따라 일찍이 금광산으로 알려졌다. 100년쯤 전에 숭아산의 북서쪽으로 흐르는 내숭동(內崇洞) 계곡, 남신동(南新洞) 계곡에서는 콩알 크기만한 사금이 많이 채집되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숭아산이 숭화산(崇化山)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 산의 봉우리에 아난굴(阿難窟)이라는 석굴이 있으며, 이 굴 안에 큰 못이 있고, 이 못에서 흘러내리는 물에 사금(砂金)이 섞여 흘러내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1870년경에 대한제국 정부에서 금·은의 개발을 장려함에 따라 이 지역의 주민 김기창(金基昌)이라는 사람이 잠시 채굴을 하였으나 1906년에 영국인 무덕과 헤이 두 사람이 은산광산의 채굴권을 얻어, 금의 채굴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그 뒤 1916년 「조선광업령시행규정(朝鮮鑛業令施行規程)」이 발표되면서 조선광업진흥회사에 흡수되어 조선광업진흥회사가 광산을 직접 경영하게 되었다.

채굴된 광석은 광산에서 수선광(手選鑛)을 한 다음 남포제련소(南浦製鍊所)로 보내져서 제련하였다. 1933년을 전후하여 300∼500㎏의 금을 채굴하는 우수한 금산이었으나, 그 뒤 산액이 차츰 감소하여 1941년에 완전히 휴광 상태에 이르렀다.

참고문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朝鮮重要鑛山槪要』(殖産局,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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