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는 러일전쟁 발발 3개월 만인 1904년 5월 이미 한국병합을 위한 기본정책을 확정하였다.
그리고 일제는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외교활동을 벌여 미국·영국·독일·프랑스·러시아 등 열강으로부터 한국침략을 승인받거나 혹은 묵인하도록 조처하였다. 그 뒤 1905년 11월 17일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고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한 일제에 의해 외교권을 박탈당함으로써 한국은 주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한국민은 을사조약이 곧 국가의 멸망임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따라서, 을사조약은 한민족을 분격시켜 거국적인 항쟁을 불러일으켰다. 이와 같은 항쟁의 기치를 가장 먼저 들고 일어선 것은 언론계였다.
특히 황성신문사 사장 장지연(張志淵)은 11월 20일자 《황성신문 皇城新聞》에 〈이날을 목놓아 통곡한다 是日也放聲大哭〉라는 논설을 발표, 일제의 침략성을 규탄하고 조약에 조인한 매국대신들을 통렬히 비난함으로써 전국민들로부터 공감을 얻었다.
이로 인해 장지연은 경무청으로 잡혀갔으며, 《황성신문》은 무기정간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 뒤를 이어 《제국신문 帝國新聞》·《대한매일신보 大韓每日申報》 등이 계속해서 조약 무효를 주장하며, 각 지방에서 전개되고 있는 조약반대운동을 상세히 보도함으로써 민족의식을 고취시켜 전국민의 항쟁을 유도, 고무시켜갔다.
언론계의 활동과 더불어 유생들과 전직·현직 관료들에 의한 상소운동도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은 조약이 강제체결되던 17일 밤에 고종을 알현하고 조약거부방안을 상주하였다가 얼마 뒤 면직처분을 받았다.
의정부참정 이상설(李相卨)도 19일 조약파기와 매국노처단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이어 박제빈(朴齊斌)·이유승(李裕承)·정명섭(丁明燮)·조세환(曺世煥)·고익상(高翊相)·김종호(金鍾護)·윤태영(尹泰榮) 등이 같은 취지의 상소운동을 계속해 나갔다. 또한, 유생들은 서울에 대한십삼도유약소(大韓十三道儒約所)를 두고 21일과 24일 두 차례에 걸쳐 상소하였다.
한편, 가평에서 신병을 요양하고 있던 전 의정부대신 조병세(趙秉世)는 조약의 강제체결 소식을 듣고 병든 몸을 이끌고 즉각 상경하여, 26·27일 이틀 동안 이근명(李根命)·민영환(閔泳煥) 등 백관을 거느리고 입궐, 매국5적의 처단과 조약파기를 상소하였다.
12월에 들어서도 전찬정(前贊政) 최익현(崔益鉉)을 필두로 강원형(姜遠馨)·곽종석(郭鍾錫)·전우(田愚)·이승희(李承熙) 등 조야로부터 조약파기와 매국노처단을 요구하는 상소운동이 계속되었다. 한편, 고종은 열강의 동정을 얻어 조약 파기를 선언하려고 하였다.
특히 조약 강제 체결 직후인 11월 22일 고종은 미국인 헐버트(Hulbert, H. B.)와 프랑스주재한국공사 민영찬(閔泳瓚) 등을 미국무장관 루트(Root, E.)에게 파견하여 한국정부의 처지를 전달하고 미국의 대한지원(對韓支援)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별다른 성과를 얻지못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일제측에 통고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또한, 상소운동과 더불어 순국항쟁이 일어났다. 전 참판 홍만식(洪萬植)을 시작으로 수많은 우국지사들이 죽음으로써 일제침략에 항거하였던 것이다. 특히, 시종무관장(侍從武官長) 민영환은 11월 30일 울분에 차 고종과 2천만 동포에게 보내는 유서를 남긴 뒤 할복자결하였다. 그런데 이 사건은 온 국민에게 큰 충격을 주어 항일운동을 격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조병세도 두 차례에 걸쳐 상소한 뒤 국민과 각국 공사에게 보내는 유서를 남기고 음독자결하였다. 두 원로대신에 뒤이어 전 참판 이명재(李命宰), 학부주사 이상철(李相哲), 이설(李偰), 송병선(宋秉璿) 등도 잇따르며 자결항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갔다.
유생·관료들뿐만 아니라 일반민중들도 조약 강제체결 소식에 일제히 분기하였다. 서울 종로에 있던 육의전이 상업회의소(商業會議所)의 결의로 철시를 단행하자, 시내의 모든 상가도 여기에 동조, 철시함으로써 조약을 강제 체결한 일제와 여기에 협조한 매국적신들을 규탄하였다.
학생들은 동맹휴학을 결행, 조약반대운동에 동참하였다. 나인영(羅寅永)·오기호(吳基鎬) 등은 을사오적암살을 기도하였으나 준비 부족으로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한편, 상소·순국 등 소극적 저항과는 달리, 일제와의 직접 항전을 통해 주권을 되찾으려는 무력항쟁인 의병운동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1906년 2월 전 참판 민종식(閔宗植)·이세영(李世永)·채광묵(蔡光默) 등은 함께 정산(定山)에서 의병을 일으켜 홍주성을 점령하며 기세를 올렸다.
같은 해 6월최익현이 임병찬(林炳瓚)과 함께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켜 호남일대를 진동시켰고, 영남에서는 정환직(鄭煥直)·용기(鏞基) 부자의 산남의진(山南義陣)이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그리고 신돌석(申乭石)도 평해·영덕 일대에서 크게 활약하였으며, 그 밖에 황해도·평안도 지역에서도 우동선(禹東鮮)·이진룡(李鎭龍)·박정빈(朴正彬) 등이 이끄는 의병진들이 국권회복을 위한 항일투쟁을 펼쳤다.
결국, 항일투쟁을 전제로 한 을사조약반대운동은 일제의 탄압을 받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운동은 밖으로는 일제침략세력을 구축하기 위한 항일운동이었고, 안으로는 부일매국노 규탄과 실력양성을 위한 민족운동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