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임시정부의 기관지인 상해판 『독립신문』에 1920년 4월 27일[제70호]부터 같은 해 5월 27일[제79호]까지 10회에 걸쳐 국한문 혼용체로 연재되었다.
명성황후시해와 단발령을 계기로 1895년부터 시작된 한말의 의병항쟁은 1910년 국치 이후 독립군으로 발전될 때까지 전후 약 20년 동안 펼쳐졌다. 이 자료는 그 전시기에 걸쳐 전국 각지 및 만주·연해주 등 국외에서 활약한 의병장을 중심으로 기술, 그 의의를 논하였다.
특히, 의병항쟁이 종료된 직후에 쓰인 만큼 내용도 비교적 정확하고 체재도 잘 갖추어져 있다. 체재상 이 자료는 서론·본론·결론의 세 부분으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먼저 ‘수언(首言)’이라 이름한 서론부에서는 의병항쟁의 역사적 의의를 개관, “자국의 권리를 옹호하고 민족의 정신을 표현하고 시대의 사상을 충격”한 것으로 의병을 이해하였다.
그리고 의병항쟁의 시기를 현재와 같이 동인(動因)을 기준으로 구분하였다. ① 민비시해기, ② 을사조약기, ③ 군대해산기 등 3기로 나누면서, 제1·2기에서는 양반 유생이, 제3기에서는 해산 군인이 각각 주체세력이 된 것으로 보았다.
본론부에서는 이와 같은 시기 구분에 의거, 각 시기별로 주로 의병장의 활약상을 기술하고 있다. 여기에는 유인석(柳麟錫)·이강년(李康䄵)·최익현(崔益鉉) 등과 같이 이름난 자들도 포함되어 있지만, 말미에 각 도별로 나누어 열거한 정용태(鄭用泰)·김병찬(金秉贊)·박승빈(朴勝彬)·윤순(尹珣)·김우선(金禹善)·강윤원(康允元) 등 다른 자료에서 찾아보기 힘든 인물들까지도 망라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결론부에서는 의병항쟁의 실패 원인을 구명하였다. 일제의 계략이 주효했음을 들면서 ‘적의 득책(得策)’으로 매국당(賣國黨)의 이용, 군대의 해산 등 실제적인 전략의 측면에서 12가지를 지적하였다.
앞으로의 항일투쟁의 방향을 평화전과 최후 혈전의 2기로 나누어 제시하면서 전국민의 동참을 촉구하였다.
이 자료는 전후 20년에 걸쳐 항일민족운동을 선도한 의병항쟁사를 민족주의적 처지에서 개관한 최초의 사론이라는 점에 큰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