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은 흥근(興根), 호는 온재(溫齋). 경상남도 마산 출신. 사회사업가 무상(舞相)의 아들이며, <산토끼>동요작가 일래(一來)의 아우이다.
1928년배재고등보통학교(培材高等普通學校)를 졸업하고, 일본에 건너가 1930년동경고등학교(東京高等學校)를 졸업하였다.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영문과를 3학년으로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에는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의 기자로 있었다. 1935년 극예술연구회(劇藝術硏究會)에 가입하였고, 같은해<촌선생 村先生>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됨으로써 극작가로 데뷔하였다. 1938년 중간극(中間劇)을 표방하는 극단 중앙무대(中央舞臺)를 설립하여 극작·연출·제작 등을 맡아 활동하였다.
1945년 10월 극단 민예(民藝)를 조직하여 좌익연극단체와 대항하는 우익민족연극운동을 펼쳤고, 1949년유치진(柳致眞)과 함께 한국연극학회를 발족시켰다.
1950년 국립극장 창설과 함께 전속극단 신협(新協)의 대표로서 민족극의 기반을 다지는 데 한 몫을 하였다. 1953년 서라벌예술대학 초대연극학과장을 맡아 연기자들을 길러냈고, 1957년 예술원회원이 되었다.
1958년 소극장 원각사(圓覺社)를 중심으로 극단 원방각(圓方角)을 창설하여 소극장운동을 잠시 펼치기도 하였다. 그의 작품세계는 그가 겪었던 식민지시대로부터 광복·동족전쟁·학생혁명 등 격동기 민중의 불행한 삶을 그리고 있다.
그는 리얼리즘기법으로 출발해서 상업성이 강한 낭만주의로 후퇴하기도 하였고, 목적극(目的劇)을 쓴 바도 있으며, 6·25전쟁 후에는 표현주의극을 썼다. 그는 뮤지컬과 심포닉 드라마(Symphonic drama)라고 하는 새로운 장르를 실험하기도 하였다.
1938년 중앙무대에서 입센의 <헬게랜드의 해적>으로 시작하여, 1963년오학영(吳學榮)작 <그 얼굴에 햇빛을>에 이르기까지 40여 편 이상을 연출하였다.
대학교수로 재직한 뒤로는 희곡보다 연극이론에 관한 글을 많이 발표하였는데, <극시형태론 劇詩形態論>·<제4벽을 모색함>·<비극미에 관한 서설적 개관>·<단군신화의 연극사적 고찰> 등이 대표적 논문이다.
대한민국문화포장·5월문예상·예술원상 등을 수상하였다. 대표작으로는 <촌선생>(1935)·<석류나무집>(1937)·<지하도>(1940)·<청계천 풍경>(1941)·<나상 裸像>(1954)·<견우와 직녀>(1954)·<지옥문을 열어라>(1966) 등이 있다.
그는 극예술연구회 이후 30여 년 동안 희곡창작·연극론·연출·극단운영 등에 걸쳐 매우 폭넓게 활약한 연극인이었다. 특히, 표현주의·상징주의 수법을 실험하기도 하는 등 반사실주의희곡의 개척자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