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순구(舜九), 호는 동미(東眉).
1859년 증광시에 생원으로 합격하였고, 1870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1874년 부수찬·수찬·부교리로 임명되었다. 1880년 성균관 대사성·호조참판·행좌부승지·부총관·형조참판, 1885년 병조참판·한성부좌윤으로 발령 받았다. 1886년 이조참판·공조참판으로 임명되었고, 1888년 주차천진독리통상사무가 되었다.
1894년 의주부윤, 의정부 동지중추원사 등에 임명되었다. 1895년 춘천부관찰사가 되고, 또한 이 해부터 여러 차례 궁내부 특진관을 역임하였다. 1896년 평안남도 관찰사가 되어 평안남도 판사를 겸임하였다. 1898년 비서원경·내부대신으로 발령 받았고, 의정부찬정을 겸하였으며, 이 해부터 여러 차례 태의원경을 역임하였다. 1899년에는 중추원의관·시종원경·장례원경·홍문관학사로 임명되었다.
1902년 경기도관찰사가 되어 경기재판소 판사를 겸임하였고, 1903년부터 여러 차례 태의원도제조를 맡았다. 또한 1904년부터 여러 차례 봉상사 도제조를 맡았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에 반대하는 상소를 지속적으로 올려 일본사령부에 구금되기도 하였다. 이 해 4월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훈1등 태극장을 받았다.
1906년 봉상사 도제조·영돈녕사사로 임명되었다. 1907년 대한제국을 방문하는 일본 황태자를 환영하기 위하여 조직된 신사회 발기에 참여하였다. 같은 해 민영규(閔泳奎)와 함께 국기를 들고 앞길을 인도하여 숙소 앞에서 만세를 불렀고, 규장각 지후관이 되었으며,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대훈이화대수장을 받았다.
1908년 대한산림협회의 명예회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1910년 3월 친일단체 일진회의 ‘합방청원운동’에 동조하는 협성회를 발기하고 임원으로 활동하며 일제의 국권 침탈에 협조하였다.
1910년 10월 7일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고, 1911년 1월 13일에 5만원의 은사공채를 받았다. 1912년 8월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1915년 식민통치의 성과를 선전하려는 목적으로 개최된 ‘시정 5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를 지원하기 위해 경성협찬회에 기부금을 내고 특별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916년 6월 이근명이 사망하자 같은 해 9월 손자 이충세(李忠世)가 그 작위를 물려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