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자유(子由). 이색(李穡)의 13대손으로, 아버지는 참봉 이병철(李秉哲)이다. 이희조(李喜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717년(숙종 43) 형 이태중(李台重)과 함께 사마양시에 합격하였다. 이이명(李頤命)이 찬(撰)한 『명릉지문(明陵志文)』 중에 경종의 생모인 희빈 장씨(禧嬪張氏)에 대한 사사(賜死) 사건이 잘못 쓰였다 하여 태학장의(太學掌議) 윤지술(尹志述)이 지문의 개찬(改撰)을 상소하였다가 사형당하자, 윤지술에 대한 처벌이 부당함을 강력히 소진(疏陳)하였다.
처음 장녕전참봉(長寧殿參奉)에서 군자감봉사(軍資監奉事)·동궁부솔(東宮副率)·상의원별제(尙衣院別提)·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사헌부감찰·형조좌랑·익위사사어(翊衛司司禦)·장악원주부(掌樂院主簿)·공조정랑 등과 진천현감·재령군수·김제군수·단양군수·인천부사 등을 역임하였고, 군자감정을 이어 담양부사로 재직 중 죽었다. 이조참판·동지의금부사·오위부총관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