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진흥과 농림직 지도자양성을 목적으로, 익산시 마동의 잠업회사를 가교사로 하여 전국 유일의 갑종 실업학교로 출발하였다.
1922년 5월 5년제 공립이리농림학교로 설립되었다. 전국의 도청소재지에서 농과 · 임과의 1학년 각 50명과 농과 3학년 54명을 선발하여 전학생을 기숙사에 입사시켰는데, 한일 공존공영을 한다는 방침으로 한국인과 일본인 학생을 반반씩 모집하였다. 1925년 4월 관립에서 도립으로 이관되고, 1931년 3월 수의축산과가 증설되어 3과에 15학급으로 편성되었다.
광복될 때까지 끊임없는 항일운동이 전개되어 광주학생사건 이후 농과 5학년 박증구를 중심으로 독서회 조직활동을 하다가, 1930년 2월 퇴학당하였다. 같은 해 11월 추계대운동회 때에 일본인 교우가 한국인을 차별하자, 민족차별철폐운동을 전개하고 맹휴한 사건으로 임과 4학년 윤수동 등 7명이 퇴학당하였다.
또한, 항일투쟁비밀조직인 화랑회사건이 1945년 4월에 적발되어 농과 4학년 이상운 등 8명과 항일투쟁으로 퇴학당한 독립당원 5명 등 13명이 구속되어 모진 고문과 시련을 당하다가, 끝까지 항거한 이상운 의사는 18세를 일기로 그 해 7월 17일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옥사하였다. 광복 전까지 졸업생 수는 한국인 1,050명과 일본인 999명을 배출하였다.
광복 후 이리농림중학교로 재개교하여 초대 교장에는 이의배(李義培)가 취임하였다. 1952년 3월 3년제 이리농림고등학교로 개편하고, 1958년에 농업토목과, 1967년에 식품가공과, 1974년에 원예과 등이 설치되었다.
1989년 3둴 농업과 · 임업과 · 축산과 · 원예과 · 식품가공과 · 농업토목과의 6개 학과 24학급에 재학생 1,400여 명, 교원 40여 명의 규모로 운영되었으며, 졸업생은 65회에 총 1만4300여 명을 배출하였다.
교훈은 ‘자립’이었으며, 1970년대애 창단된 럭비부와 1986년에 재창단된 씨름부의 체육활동이 두드러졌다. 특히 선진농업기술 · 식물조직배양 · 수경재배 · 화훼재배 · 영지버섯재배 · 목공예기술 등의 특색사업에 중점을 둔 교육은 대학편입으로 더욱 활성화 되었다.
1991년 3월 이리농공전문대학으로 승격되었으며, 1998년 익산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