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연(子淵), 호는 구촌(龜村). 효령대군(孝寧大君)의 7대손이며, 용강현령(龍岡縣令) 이대(李薱)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이조판서 이양(李樑)이고, 아버지는 정랑 이정빈(李廷賓)이며, 어머니는 청주한씨(淸州韓氏)로 한수(韓洙)의 딸이다.
1591년(선조 24)에 진사가 되고, 1606년(선조 39)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설서·정언·지제교를 지냈다. 광해군 초에 평안도어사·이조정랑 등을 지내면서 이이첨(李爾瞻) 등의 정책에 반대하여 사임하고, 1613년(광해군 5) 응교로 있으면서 영창대군(永昌大君)에게 죄주는 것의 부당함을 주장하다가 파직되었다.
그 뒤 복직되어 1618년(광해군 10) 서천군수가 되고, 1622년(광해군 14) 동부승지·황연도관찰사(黃延道觀察使)를 지냈다. 이듬해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후 전라도관찰사에 특진되었으며,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 때에 인조의 공주 몽진을 도왔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에는 경기도관찰사로서 전란수습에 공을 세웠고, 그 뒤 평안도관찰사로 나가 국경방비를 강화하였다.
그 뒤 여러 곳의 관찰사를 거쳐 호조·병조·형조의 참판을 지냈으며, 병자호란 뒤에는 다시 호조·형조의 판서를 역임하면서 전란 후 고갈된 재정을 잘 수습하였다. 말년에는 지중추부사로 전의제조(典醫提調)를 겸임하였으며, 좌찬성에 증직되었다. 저서로는 『구촌유고(龜村遺稿)』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