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경숙(敬叔), 호는 백운(白雲) 또는 봉천(鳳川). 관찰사 이억손(李億孫)의 현손이며, 이유민(李惟敏)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이결(李潔)이고, 아버지는 이덕익(李德益)이며, 어머니는 홍양(洪逿)의 딸이다.
1675년(숙종 1) 정릉참봉(貞陵參奉)으로서 증광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77년부터 1679년까지 사헌부의 장령(掌令)·지평(持平)과 사간원의 정언(正言)을 역임하였다. 장령으로 있던 1679년에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의 문인인 회덕(懷德)의 생원 송상민(宋尙敏)이 예송(禮訟)의 시말(始末)을 적은 책자를 올리자, 숙종이 대로하여 송상민과 책자의 글을 쓴 박세징(朴世徵)이 옥사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 때 양사(兩司)의 권대재(權大載)·이수경(李壽慶)·이현석(李玄錫)·오정위(吳挺緯)·송정렴(宋挺濂)·배정휘(裵正徽) 등과 함께 송시열의 가죄(加罪)를 주청하여, 장기(長鬐)에 위리안치되어 있던 송시열은 거제도로 이배되었다.
그 뒤 5월에 사직하면서 다시 송시열을 사형에 처할 것을 상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뒤 노론의 집권으로 관계에서 물러나왔다. 글씨로 원천석(元天錫)의 묘갈 등이 있다. 저서로는 『백운필적(白雲筆迹)』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