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상경(尙褧). 할아버지는 영의정 이유(李濡)이고, 아버지는 현감 이현응(李顯應)이며, 어머니는 홍중기(洪重箕)의 딸이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의 사위이다.
1741년(영조 17) 진사가 되어 1744년 헌릉(獻陵) 참봉을 제수받았으나, 이 때 장인인 김재로가 대관(臺官)의 탄핵을 받아 결국 입사하지 못하였다. 1744년 감조관(監造官)의 공로를 인정받아 승륙(陞六)하여 제용감주부(濟用監主簿)·호조좌랑을 거쳐 정랑으로 승진하였다.
이어 강서현감·금성현령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황주목사에 제수되어 양전사업(量田事業)을 추진하였다. 이어서 진주목사·공조정랑·파주목사·선혜청낭청·사복시판관을 역임하였고, 1770년 예천군수가 되어 시노비(寺奴婢)의 폐해를 제거하였으며, 이천부사를 거쳐 1774년 평양서윤에 임명되었다가 파직되었다.
이듬해 나주목사로 부임하였다가 통정대부로 가자되어 첨지중추부사의 자리에 올랐다. 1778년(정조 2) 광주부윤(廣州府尹)으로서 남한산성을 개축하여 그 공으로 충청감사로 특배되었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으며, 이어서 돈녕부와 의금부의 동지사의 자리에 올랐다.
1780년 맏아들 이의익(李義翊)이 대간의 탄핵을 받아 참판의 자리에서 쫓겨나자, 이를 계기로 조정에서 물러나와 귀록산(歸鹿山)에 은거하였다. 1782년 총관(摠管)에 임명되었으나, 아우인 이조판서 이최중(李最中)이 섬에 유배되는 등의 일로 끝내 나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