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이 발발한 이후 계속되는 흉년으로 민중들의 생활은 비참하였다. 또한, 당시 조정에서는 명(明)·일(日) 사이에 강화를 둘러싸고 찬반 양론의 논쟁이 치열하였다.
일본의 재침을 방비하기 위해 각처의 산성을 수축하는 등 민중의 부담이 가중되자 확대되어가는 민중의 원성과 고통은 현실 여건과 타협될 수 없는 사회 모순을 낳게 되었다. 이러한 기회를 포착해 이몽학은 불평불만에 가득 찬 민중을 선동, 반란을 획책한 것이다.
이몽학은 본래 왕실의 서얼(庶孽)출신으로, 아버지에게 쫓겨나 충청도·전라도 등지를 전전하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모속관(募粟官) 한현(韓絢)의 휘하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반란을 일으키기 얼마 전부터 한현과 함께 홍산(鴻山 : 지금의 부여군) 무량사(無量寺)에서 모의를 하고 군사를 조련(操鍊)하였다. 동갑회(同甲會)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해 친목회를 가장한 반란군 규합에 열중했다.
한현은 선봉장 권인룡(權仁龍)·김시약(金時約) 등과 함께 어사 이시발(李時發)의 휘하에 있으면서 호서 지방의 조련을 관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민심이 이반되고 방비가 소홀함을 알아차리고 이몽학과 함께 시리(時利)에 편승해서 거사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 때 한현은 아버지의 상을 당해 홍주(洪州 : 지금의 홍성)로 내려가면서 이몽학에게 먼저 거사할 것을 이르고 자신은 내포(內浦)로부터 상응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이는 거사의 성패만을 관망하려 한 것이다.
이몽학은 김경창(金慶昌)·이구(李龜)·장후재(張後載), 도천사(道泉寺) 승려 능운(凌雲), 사노(私奴) 팽종(彭從) 등과 함께 홍산 쌍방축(雙防築)에 주둔하니 승속군(僧俗軍)이 무려 600∼700명이었다. 1596년 7월 6일 이몽학 일당이 야음을 타고 홍산현을 습격해 현감 윤영현(尹英賢)을 붙잡았다.
이어 임천군(林川郡)을 습격해 군수 박진국(朴振國)을 납치하였으며, 이들은 모두 반군에게 항복해 빌붙게 되었다. 7일에는 정산현(定山縣)을, 8일에는 청양현(靑陽縣)을 함락하니 정산현감 정대경(鄭大卿)과 청양현감 윤승서(尹承緖)는 도망하였다.
9일에는 대흥군(大興郡)을 함락하니 군수 이질수(李質粹) 또한 산중으로 도주하였다가 간신히 적정을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와 같이, 수령들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해 항복하거나 도주하고 이민(吏民)들도 모두 반군에게 복종하니 그 무리가 수만 명에 달하게 되었다.
또한, 부여현감 허수겸(許守謙)은 반란군이 경내에 들어오기도 전에 겁을 먹어, 수하인들이 무기를 적진으로 운반하는 것을 보고도 감히 처단하지 못하고 반란군이 경내에 들어오자 문서를 반란군에 전해주었다.
서산군수 이충길(李忠吉)은 아우 3명을 반란군에게 몰래 통하게 하여 도와주었다. 이렇게 되자, 이몽학은 대흥을 함락한 같은 날에 홍주를 침범하게 되었다.
홍주목사 홍가신(洪可臣)은 주관속(州官屬) 이희(李希)·신수(申壽)를 반군 진영에 보내어 거짓 투항하게 하여 방어에 따른 준비를 갖출 수 있는 시간을 얻는 한편, 고을에 사는 무장 박명현(朴名賢)·임득의(林得義) 등을 기용, 많은 무사들을 모이게 하였다.
체찰사종사관 신경행(辛景行)도 인근 수령에게 전령해 구원을 청했다. 수사 최호(崔湖)도 군사를 이끌고 입성하니 홍주성의 수성 계획은 완전히 갖추어졌다.
반란군과 맞서 싸우는 동안 충청병사 이시언(李時言)이 홍주로 향해 무량사에 이르렀고, 어사 이시발은 유구(維鳩)에, 중군(中軍) 이간(李侃)은 청양에 포진해 장차 홍주로 향하려는 군사의 위세를 떨쳤다.
이몽학이 성의 함락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11일 새벽에 무리를 이끌고 덕산(德山)을 향해 달아나자 반란군 중에 도망자가 속출하였다. 이때를 이용해 반란군 진영에 무사를 보내어 혼란시키면서, 이몽학의 목을 베는 자는 반란에 가담하였다 하더라도 큰 상을 내리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반란군 중에서 다투어 이몽학의 목을 먼저 베려는 자가 속출하였고, 결국 반란군 김경창 등에 의해 이몽학은 참수되었다. 이때 한현은 반군 수천 명을 이끌고 홍주에 주둔하고 있었으나, 홍가신의 진군으로 패주하다 사로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서울로 압송되어 처형된 사람은 33 명이며 외방에서 처형된 사람이 100여 명이나 되었다. 연좌율(緣坐律)을 적용하게 되면 그 수가 너무 많아짐에 따라 특별한 경우에만 적용해 희생자를 가급적 줄였다. 이리하여 반란 주모자의 처리는 일단락되었으나 반도들의 입에서 나온 의병장들의 무인사건(誣引事件)은 당시에 큰 충격을 주었다.
김덕령(金德齡)·최담령(崔聃齡)·홍계남(洪季男)·곽재우(郭再祐)·고언백(高彦伯) 등이 무인되었다. 그 중에서 김덕령과 최담령은 혹독한 심문 끝에 억울하게 장살(杖殺)당하거나 옥사하였다. 김덕령은 뒤에 신원되었으나 반란 사건으로 희생된 사람은 난 처리가 끝난 뒤에도 늘어났다.
난을 토평(討平)하는 데 공을 세운 사람은 1604년 청난공신(淸難功臣)으로 책록되었다. 1등에 홍가신, 2등에 박명현·최호, 3등에 신경행·임득의 등이 책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