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원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병조판서, 판의금부사, 예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사질(士質)
시호
익헌(翼憲)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740년(영조 16)
사망 연도
1794년(정조 18)
본관
연안(延安, 지금의 황해도 연백)
주요 관직
병조판서|판의금부사|예조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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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병조판서, 판의금부사, 예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사질(士質). 할아버지는 옥천군수 이주신(李舟臣)이고, 아버지는 영의정 이천보(李天補)이며, 어머니는 송상유(宋相維)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63년 진사시에 합격해 음보로 휘령전참봉(徽寧殿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1771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교리·승지를 지냈으며, 1779년 대사간을 거쳐 이듬 해 동래부사·경상감사에 승진하였다. 1781년 중앙으로 돌아와 대사간·성균관대사성을 지내고, 1784년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1786년 공조판서로 임명되었을 때 왕세자가 죽으니 약방제조(藥房提調)로서 삼사(三司)의 탄핵을 받았다. 그 해 여주목사로 부임했으며, 이듬해 부사직(副司直)·지경연사(知經筵事)·선혜청제조(宣惠廳提調) 등을 역임하다가 11월에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곧 종부시제조(宗簿寺提調)를 잘못 천거해 추고(推考: 심문해 징계함)되었다.

이듬해 1월 벽파로부터 홍봉한(洪鳳漢)과 관계를 맺던 한덕후(韓德厚)를 대직(臺職)에 천거했다는 비난을 받자, 빈청(賓廳)에서 조복(朝服)을 벗어던지고 퇴궐해 숙천부(肅川府)에 유배되었다가 석달 만에 풀려났다.

그 뒤 형조판서를 거쳐 병조판서가 되었는데, 1789년 인척인 오재순(吳載純)이 이조판서에 오르자 한 집안에서 양전(兩銓)을 겸할 수 없다 하여 사직소를 올리고 물러났다.

그 뒤 판의금부사를 거쳐 1790년 함경도관찰사로 부임, 2년간 재직하다가 돌아와 예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792년 이조판서로 있던 중 채제공(蔡濟恭)을 심하게 논척하는 소를 올려 향리로 쫓겨났다.

그 뒤 곧 형조판서에 다시 서용되어 병조판서·판의금부사·예조판서 등을 지내다가, 1793년 이조판서로 있던 중 수찬 최헌중(崔獻重)의 탄핵을 받고 사직소를 올려 체직(遞職: 관직이 교체됨)되었으며, 지경연사·부사직·형조판서 등을 지냈다. 시호는 익헌(翼憲)이다.

참고문헌

『영조실록(英祖實錄)』
『정조실록(正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풍서집(豊墅集)』(이민보(李敏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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